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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16)은이성지: 조선의 첫 사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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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에게 은이는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장소기도 하지만, 사제품을 받고 다시 조선을 찾은 성 김대건이 사목을 펼친 장소기도 하다. 사제가 된 성 김대건은 어떻게 사목을 펼쳤을까.


■ 중국에서의 서품

은이성지 마당에 들어서니 새하얀 성당이 눈길을 끌었다. 십자가 아래 ‘천주당’(天主堂)이라는 문구가 적힌 성당은 그간 내린 하얀 눈 속에서도 더 하얗게 돋보였다. 중국식 성당 건축양식으로 세워진 이 성당은 성 김대건이 서품을 받은, 중국 상하이 진자샹(金家巷)에 자리한 성당을 원형대로 복원한 건물이다. 성당은 한자를 우리 발음으로 읽어 ‘김가항성당’이라고 부른다.

성 김대건이 서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로를 개척한 공로를 크게 평가받았기 때문이었다. 부제품을 받은 성 김대건은 조선에 입국해 선교거점을 마련한 뒤, 배를 타고 중국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해로를 통한 입국로를 개척한 것이었다.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이런 성 김대건의 성공에 크게 기뻐하면서 그의 사제서품식을 주례했다. 그리고 사제가 된 성 김대건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성 김대건이 조선 입국로를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피땀 어린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 김대건은 신학생 시절부터 프랑스 함대에 승선하는 등 조선 입국로 개척을 시도하면서 지리·항해에 관한 전문지식을 쌓아왔다. 또한 실제 조선에 입국해 상황을 살피면서 배를 통한 입국에 따르는 어려움도 면밀히 분석했다. 덕분에 올바른 항로 설정과 항해가 가능했던 것이다.




■ 짧았지만, 열성적이었던 사목

성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사제품을 받고 약 13개월 동안 활동하다 순교했다. 그마저도 많은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기에 체포되기 전까지 신자들을 만나며 사목한 것은 겨우 6개월 남짓이었다.

성 김대건이 이 6개월간 어떤 사목활동을 펼쳤는지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자료는 찾기 어렵다. 다만 여러 사료와 증언을 통해 성 김대건의 사목을 짐작해볼 수 있다.

성 김대건은 서울이나 강경 등에서도 활동했지만, 특히 용인지역과 은이를 중심으로 사목을 펼쳤던 것으로 보인다. 시복재판 자료에 따르면, 오 바실리오는 1846년 봄 은이마을에서 성 김대건을 봤다고 증언한다. 임 루치아도 양지의 터골에서 성 김대건에게 성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성 김대건이 체포되기 전 신자들과 함께 봉헌한 마지막 미사인 1846년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성 김대건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있던 은이마을에서 봉헌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 6개월 동안 성 김대건을 만난 신자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그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사목했는지 보여준다.

남경문(베드로) 성인은 성 김대건을 통해 회개의 삶을 살다 순교했다. 남경문은 회장으로 활동하다 기해박해 때 배교하고 8년에 걸쳐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성 김대건을 만나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받으며 죄를 뉘우쳤고, 매일 기도와 고행으로 과거를 속죄했다. 그리고 성 김대건이 체포되자 자신도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다 붙잡혀 순교했다. 남경문만이 아니었다. 성 김대건의 시복재판 자료에 따르면 이 베드로는 “교리를 설명하고 교우들을 가르치는데 기쁨과 열성을 다했고, 큰 열성으로 성사를 집전했다”고 김대건을 기억했다. 김 프란치스코는 “모든 교우들이 이 신부(성 김대건)를 많이 사랑했으며, 그들은 오로지 신부를 칭찬할 뿐이었다”고 밝혔다.

성 김대건은 옥중에서도 사목을 멈추지 않았다. 옥중에서도 꾸준히 성사를 집전하며 옥에 갇힌 신자들을 돌봤다. 또 자신을 심문하며 박해하는 사람에게까지도 복음의 진리를 선포했다.

옥중에서도 열성적이었던 성 김대건의 사목을 증언하는 인물이 바로 임치백(요셉) 성인이다. 임치백은 옥중에 있던 성 김대건에게 가르침을 듣고, 옥중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했다.


■ 조선교회를 위한 다양한 활동

성 김대건의 활동은 신자들을 돌보는 데 그치지 않았다. 조선교회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지도 제작이다. 성 김대건은 부제품을 받고 조선을 방문한 시점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전도를 제작했다. 샤를르 달레 신부가 쓴 「한국 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성 김대건은 서울 한성부(漢城府) 서고의 지도를 참조해 조선전도를 제작했다. 이미 제작된 지도를 바탕으로 만들었지만, 해박한 지리지식 없이는 지도를 옮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성 김대건은 ‘조선전도’에 전국의 주요 관부와 병영 266곳, 만주 봉황성에서 의주까지 들어오는 도로, 남해안 해로 등을 기록하면서, 지명을 우리말 발음 그대로 옮겨 로마자로 표기했다. 무엇보다 선교사들이 해로를 통해 입국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해안의 섬과 바위를 상세하게 표기했다. 윤지충(바오로) 복자의 고향 진산 등 교회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들도 표시했다. ‘조선전도’는 사목을 위한 지도였던 것이다.

또 성 김대건은 조선교회의 선교자금 마련을 위한 방법도 고민했다. 그는 조선과 청나라의 물물교역을 관찰하면서 양국의 품목을 분석해 조선에서 팔 수 있는 품목을 제안했다. 실제로 1845년 조선 입국 당시 성 김대건은 서양 마포를 산 가격의 두 배 값으로 팔아 자금을 만들었다. 또 1845년 7월에는 편지를 통해 조선에서 통용되는 은전 모양을 그려 보내며 중국의 은괴를 녹여 조선의 은괴를 만드는 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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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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