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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80장면] (31) 1976년 103위 한국 순교복자 시성 청원서 교황청 접수

"시성 신청서 교황청에 정식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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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12월 19일자 가톨릭시보 3면
 
▶ 1978년 9월 미리내에서 열린 순교자 현양대회 모습.
한국교회는 1970년대 후반부터 전국에서 순교자 현양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다.
 
“諡聖 신청서 聖聽에 正式 접수

한국 103위 복자의 시성 신청서가 지난 10월 15일 교황청 성사, 경신성성에 정식 제출되어 절차를 밟고 있음이 최근 로마에서 한국 순교 복자의 시성을 맡고 있는 이태리인 변호사 율리오 단떼씨가 시성시복추진위 관계자에게 보낸 서한에서 알려졌다.

단떼씨는 지난 8일 시성시복추진위 상임위원인 오기선 신부에게 10월 15일 103위 복자에 대한 시성신청과 4월 한국주교단이 보낸 시성청원서, 최근 서울에서 있은 한 환자의 치유에 관한 사실 기록, 한국의 시성시복추진운동 내용을 묶은 시성신청서를 성사경신성성에 정식 제출했음을 알려왔다.” (가톨릭시보 1976년 12월 19일자 3면 중에서)

교황청도 큰 관심 보여

한국교회 순교 선조 103위의 시복시성 추진이 결실을 맺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이 기사에 따르면 이러한 행정적인 절차 뿐만 아니라, 한국 국내에서의 시복시성 운동과 순교자 현양 운동에 대해서 교황청에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즉 그해 9월 미리내성지에서 거행된 순교자 현양대회가 교황청 기관지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지에 소개되는 등 선교 지역인 한국에서의 순교자 현양 운동에 대해서 로마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때를 전후해 한국 교회 안에서는 순교자 현양을 위한 다양한 행사와 기도 모임들이 수시로 열리고 있었다. 우선 시성시복운동을 추진하는 공적 기구로 설치된 ‘시성시복 추진위원회’는 10월 28일 오후 서울 꾸르실료 회관에서 첫 상임위원회 회의를 열고 5개 분과 위원회를 구성하고 기도문 제작 배포와 모금 등의 각종 활동 방침을 논의했다.

당시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최석우 신부는 10월 17일자 가톨릭시보에 기고한 글에서 ‘순교자 현양은 우리의 사명’이라고 일깨우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성운동이 서울 한구석 몇몇 성직자와 평신도 동지들의 모임인양 느껴지던 것이 신문의 보도로 점차 전국적으로 번져가고 있음을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이러하게 신속하게 또 광범하게 번질 줄은 정말 미처 몰랐다”고 감탄했다.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지에서 관심을 보인 미리내 복자 현양대회에 대해 가톨릭시보는 10월 3일자 보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복자 김대건 신부 순교 130주년을 맞이하여 수원교구는 한국 순교복자축일인 9월 26일 천주교 박해 때의 피난지이며 김대건 신부 등 순교자의 무덤이 있는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 미리내 성지에서 연 2만 5천명으로 추산되는 인파가 깊은 산골을 뒤덮은 가운데 대대적인 순교자 현양 대회를 거행했다.”(가톨릭시보 1976년 10월 3일자 3면 중에서)

1984년 103위 성인 탄생

그 후 8년 뒤인 1984년 5월 6일 한국교회는 200년 한국 천주교회 역사에서 최초로, 그것도 무려 103위나 되는 한국 성인이 탄생하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게 된다.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대회’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성인 시성식은 암울한 시대상 속에서, 현대사의 고난과 역경을 분단의 현실 속에서 상징적으로 품고 있는 한국교회 최대의 경사였다.

박영호 기자 young@catholictime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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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07-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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