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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 - 성 김제준 이냐시오

찰나의 흔들림 이기고 신앙 지켜, 김대건 신부 아버지 … 은이공소 회장직도, 큰 고통에 배교 택했다가 곧 반성하고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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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김제준 이냐시오
 

최경환 성인이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라면, 김제준 성인은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다.

비록 사제직이라는 아들의 그림자에 가려져있는 아버지들이지만, 자녀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준 소중한 평신도의 모습을 간직한 이들이다.

각 성인들의 순교한 해를 살펴보면, 신앙선조의 가계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우리나라 신앙은 가문의 줄기를 타고 흘렀다.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역시 최경환 성인과 같은 해인 1839년, 기해년에 일어난 박해로 9월 26일 순교했다.

당시 회장직을 맡았던 김제준 성인은 할아버지 김진후와 작은 아버지 김종한에게 천주교를 배워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고 우르술라와 결혼해 아들 김대건을 낳았다.

김제준 성인은 한때 냉담상태에 있다가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만나 마음을 다잡았던 인물이다.

또 체포됐을 때는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했다가 배교를 취소하고 순교하기도 했다. 찰나의 흔들림이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모습은 나약한 우리와 더욱 닮았고, 그의 삶의 덕행은 아들 김대건을 우리나라 첫 번째 사제로 만들었다.

김제준 성인은 아들을 외국으로 유학시켰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온 집안이 몰살될 줄 알면서도 아들을 마카오로 보낼 만큼 신앙심이 깊었다. 그는 1836년 초 서울 정하상의 집에 머물던 모방 신부를 찾아가 성사를 받고 돌아와 더 열심히 수계했으며, 은이공소의 회장으로 임명됐다.

그의 회장 활동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이곳에서 그는 장남 김대건(당시 15세)을 신학생으로 만들어 마카오로 유학을 보낼 정도로 담대했으며, 신앙의 열정을 꽃피웠다.

1839년, 많은 신앙선조들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기해박해가 일어난다. 김순성(김여상) 일당의 밀고로 체포된 김제준은 국사범으로 인정됐다. 회장직을 수행하고, 아들까지 유학을 보낸 그가 다른 교우보다 더욱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음은 두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쏟아지는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그가 결국 배교를 말하자, 교우들은 한마음으로 그를 다독이며 ‘순교자로서 세상을 마치라’고 조언한다.

교우들이 주는 용기가 그를 움직였을까.

형조로 옮겨져 진정으로 통회한 그는 새로운 결심으로 순교를 준비했다. 3회에 걸쳐 잔악한 형벌을 받은 그는 44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조신철 가롤로 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하느님께로 갔다.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과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은 아들 신학생들이 롤롬보이에 머물 때인 기해년 9월 11일과 26일 각각 순교한 것이다. 타지에 떨어져 고국의 부모를 걱정하던 두 신학생의 아픔과 눈물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김대건 성인은 아버지 김제준 성인의 바람대로 사제가 됐으며, 역경 끝에 우리나라로 돌아와 복음을 전파하려다 1846년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아버지 김제준 성인이 순교한지 꼭 7년만이다.


오혜민 기자 (oh0311@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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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1-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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