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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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인천 답동본당

지역 복음화의 ‘마중물’이자 영적 쉼터, 고아원·병원 등 운영하며 지역 복지에 기여, 열린 문화영성공간으로 변모하고자 계획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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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위용을 뽐내는 답동성당.
1894년 설계, 완공됐으며 1937년 현재 모습을 갖췄다. 사적 287호로 지정됐다.
 

인천시 중구 답동 언덕 한가운데 답동성당이 자리한다. 19세기 말, 이곳은 서울을 가기 위한 관문이자, 해외교류의 주요 거점이었던 인천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위치였다.

개항지인 인천에 본당이 설립되자, 한국교회에 파견된 선교사 다수는 이 본당에서 한숨을 돌리고 전국 각지로 선교 여정을 떠날 수 있었다. 게다가 번듯한 성당 건물이 세워지기 전부터 본당 사제와 신자들은 성당 터 인근에서 노동자들과 환자들, 고아 등을 돌보는 나눔의 씨앗도 싹틔웠다. 한국교회에 최초로 진출한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가 수녀원을 건립하고 사도직 활동을 시작한 곳도 바로 답동성당이다.

한국교회 선교의 문으로서 뿌리내렸던 답동본당은 설립 120여 년이 흐른 이 시간에도 한결같은 모습을 간직하며, 지역사회 복음화의 ‘마중물’로서 새로운 복음화의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인천지역에서는 초기 교회 때부터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배출됐다. 교회사 기록에서는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로 한 신앙생활과 박해 상황 등을 자세히 소개한다. 이승훈(베드로)의 손자 이재의(토마스), 마카오에 유학을 떠났던 최방제의 형 최형(베드로)과 현석문(가롤로) 등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도 인천을 오가며 신앙을 전파했다.

답동본당 미사가 처음으로 봉헌된 때는 1889년 7월 8일이었다. 개항지에 본당을 설립하려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노력에 힘입어 답동본당이 설립, 초대 주임으로 빌렘(홍요셉) 신부가 파견된 지 일주일 만이었다. 당시 인천지역 신자는 한국인 59명과 일본인 25명이었다. 그즈음 인천지역 선교는 내·외적으로 많은 장애물을 안고 있었다. 지역 특성상 다양한 인종과 국적을 가진 주민들이 함께 살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개신교계의 방해로 인한 선교의 어려움을 이중적으로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러 힘겨운 배경을 딛고 본당 사목은 샬트르성바로오수녀회의 사도직 활동과 더불어 선교에서뿐 아니라 사회 각계에서 더욱 다양하게 펼쳐졌다. 특히 본당은 1900년 인천사립박문소학교를 설립, 신자들과 가난한 이들의 교육에 헌신했다. 또한 해성보육원과 해성병원의 모태가 된 고아원과 병원 등을 건립, 지역 사회복지사업의 구심점이 됐다. 백령도와 연평도를 비롯해 크고 작은 서해안 섬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고 공소와 본당을 설립하는데 든든한 지원군이 된 것도 바로 답동본당이었다. 지역사회 복음화의 산실로서의 역할은 더욱 커져 부평본당을 비롯해 다수의 본당을 분가, 설립하는 데에도 매진해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본당 관할 지역의 도심공동화와 인구 노령화 등으로 사목적 어려움을 겪는 것도 현실이다.

오랜 시간 안에서도 첫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성당 또한 본당의 역사와 복음화의 여정에서 큰 버팀목으로 자리해왔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위용을 뽐내는 답동성당은 1894년 명동성당을 설계한 코스트 신부와 샤르즈뵈프 신부가 설계, 완공했다. 이어 신자 수 증가에 따라 증축, 1937년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췄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와 건축학적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성당은 1981년 사적 287호로 지정, 현재 인천을 찾는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명소이자 신자들의 주요 도보순례지로 자리하고 있다.

무엇보다 답동본당은 주교좌본당으로서, 본당 공동체와 교구민들은 물론 일반인들을 위한 선교와 교회 이미지 구축의 중심지로 사목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성당은 현재 교구청과 교구 가톨릭회관 가운데에 위치, 교구의 각종 행사 장소로서도 적극 활용된다. 이때문에 본당 공동체는 교구민들과 인근 지역을 오가는 신자 및 관광객 등을 위해 매일의 전례와 행사를 위한 보다 안정된 인프라 제공 등에 꾸준히 힘쓰고 있다.

인천시와 중구도 답동성당의 이러한 지역적·역사적 가치 등을 높이 평가, 지난 해 답동성당 일대를 녹지대와 휴게공간, 유물전시관 등을 갖춘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인천교구와 답동본당은 가톨릭성지를 보존하고 지역 주민들과 역사·문화적 가치를 공유하는 노력의 하나로 답동 일대 공동개발에 협력할 뜻을 밝힌 바 있다. 120여 년 역사를 간직한 답동성당이 더욱 폭넓게 열린 문화영성 공간으로 자리할 수 있도록 돕는 노력의 하나다.

답동본당 주임 이민주 신부는 “우리 본당 공동체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성당을 다듬고 개방해 오가는 이들이 몸과 마음을 쉬고 신앙을 다지도록 돕는데 큰 의미를 둔다”며 “젊은 신자 수가 적은 어려움도 있지만, 명나라 문인 고계의 말처럼 노인이 편안하고 어린이가 즐거운 ‘모안치희’의 모습을 보이는 공동체의 모습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이 신부는 “성당 외적인 면뿐 아니라 내적 지원에서 오랜 전통을 바탕으로 성당을 찾는 이들 누구에게나 더욱 기쁘고 편안한 곳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 본당 성모회와 함께한 송도 야유회(1968년 4월).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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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1-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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