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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 - 성 현석문 가롤로

박해 피하며 순교자 전기 집필, 성직자영입운동 힘쓰고 회장직분에 충실, 순교할 때까지 교우들 돌보며 순교 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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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현석문 가롤로
 

한국교회 103위 성인을 돌이켜보면, 그 가운데 26명이 공식적으로 회장직분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본당회장과 공소회장, 전교회장, 여회장 등 회장제도는 한국 천주교회의 고유한 제도로서 교회 초창기의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됐다.

회장직분을 성실히 수행한 다른 성인들처럼 평신도 현석문(가롤로) 또한 회장직을 수행한 성인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그에게 더욱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비교적 오랜 기간 살면서 성직자영입 운동에 힘썼고, 순교자들의 기록을 정리한 「기해일기」를 펴냈으며, 회장직에 충실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현석문은 신유박해 순교자 현계흠의 아들이자, 기해박해 순교자 현경련 성인의 동생이다. 현석문이 병오박해에 순교했으니, 이들 가족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 순교사가 그대로 눈에 보이는 셈이다.

현석문은 서울 중인 계급 출신으로 독실한 교우 집안에서 태어났다. 5살 때 부친을 잃고, 1821년 14살 때 네살 위인 김 데레사와 결혼, 아들과 딸 하나씩을 두었다. 그는 서울에 올라와 명도회원이 돼 1827년 이경언과 정하상을 도와 성직자 영입을 꿈꿨으며, 1837년 샤스탕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자 그의 ‘복사’로서 교우촌을 순회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회장에 임명돼 앵베르 주교로부터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고 조선교회를 돌보라는 임무를 맡았으며, ‘이재영’이라는 이름으로 몰래 피신하며 신앙활동을 계속했다. 그의 가명은 기해박해 당시 목숨을 잃은 정하상 등 동료들과는 달리 그가 피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듯하다.

현석문이 피신한 것은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과 최영수, 이재의, 이문우 등이 수집한 순교자료를 토대로 순교자들의 전기를 완성했다. 이것이 곧 「기해일기」다.

또한 각지에 흩어진 교우들을 직접 찾아가 격려했으며, 1845년에는 김대건 신부와 함께 중국 상해에 다녀오기도 했다. 당시 김대건은 부제였는데 현석문을 만나 「기해일기」를 토대로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썼으며 그것을 마카오로 보냈다. 이는 훗날 순교자들의 순교 사실과 상황을 입증하는 자료가 된다.

1846년 6월 김대건 신부가 황해도에서 체포된 다음달인 7월, 현석문이 체포되는데 그가 숨겨주었던 여교우 김임이와 정철염 등도 함께 체포돼 포도청으로 압송됐다.

현석문은 교회 지도자이자 외국을 비밀리에 왕래했다는 죄목 등이 추가돼 다른 교우들보다 심한 문초와 무거운 벌을 받았으며, 군문효수형에 처해졌다.

9월 19일 50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순교할 때까지 그는 함께 갇힌 교우들을 위로하고 순교로 나아갈 수 있도록 권면하며 지냈다고 한다.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된 103위 성인에 속한다.


오혜민 기자 (oh0311@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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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1-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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