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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성 베네딕도회 <1> (서울·덕원·연길수도원)

선교·수도생활 겸한 새로운 모델 제시, 교육사업 통해 선교·여성교육에 헌신, 성직자 양성·교회서적 출판 등도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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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원수도원과 신학교 전경. 중세 독일의 히르사우 수도원을 모델로 삼아 지어진 덕원수도원은 동아시아의 서양식 근대 건축 분야에서 예술적 사상적으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100여 년전 1909년 2월 25일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 소속 두명의 수도자가 극동의 낯선 나라 한국에 첫발을 내딛었다. 이들은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파견된 도미니꾸스 엔쇼프 신부, 그리고 신 보니파시오 사우워 신부였다. 당시 조선대목구장을 맡고 있던 뮈텔 주교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그때 한국의 가톨릭교회 즉 조선교회는 1905년을 기해 일본이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기 시작하고 한국에 들어온 미국 개신교 선교협회가 엄청난 재정능력과 인력을 바탕으로 선교활동에 매진하던 상황에서 신학교 외에 고등 교육기관을 보유하지 못한 처지였다. 학교를 세우고 교사를 채용할 여력이 없었다. 또 선교권이 파리외방전교회에 한정돼 있었기에 프랑스 선교사들과 방인 사제 몇 명만으로는 그 같은 교육 사업을 전개하기도 힘들었다. 그런 면에서 뮈텔 주교는 한국 선교에 협력할 수 있는 교육수도회 초청을 위해 무척 고심하고 있었다.

뮈텔 주교 일기 등 자료에 따르면, 1908년 교육 수도회 설립에 적합한 수도회 물색을 위해 프랑스로 떠난 뮈텔 주교는 수많은 수도회를 방문했으나 인력부족 등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 로마에서도 역시 수도회마다 한국 진출을 권유했으나 좋은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한다. 이때 포교성성 장관 고티 추기경을 만난 자리에서 오틸리엔수도원을 소개 받았고 뮈텔 주교는 수도원을 찾아가 놀벨도 웨버 아빠스를 만난 후 인재 양성을 위한 학교 설립을 요청, 수락을 받아냈다.

당시의 오틸리엔수도원은 그야말로 신생 수도원에 가까웠다. 1884년 베네딕도회적 소명에 선교 소명을 결합한 오딜리아 연합회를 창립한 암라인 신부에 의해 선교본부 형태로 있다가 1897년 정식 수도원이 되었고 아빠스좌 수도원이 된지는 5년여에 불과했다. 창설 즉시 동아프리카 선교에 총력을 기울이던 형국이어서 이름도 모르는 극동의 작은 나라에 선뜻 선교사 파견을 결정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때 웨버 아빠스는 사범학교는 물론 독일식 기술학교까지 열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것은 아마도 모진 박해를 겪고 막 선교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 한국교회에 대한 선교 지원 필요성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은 ‘학교 설립’이라는 일차적 이유와 함께 수도생활의 실현이라는 목적이 바탕에 두어졌다.

두 명의 수도자는 서울 도착과 함께 학교 부지를 물색, 서울 백동 낙산 아래 3만여 평의 땅(현 가톨릭 대신학교와 동성 중고등학교 자리)을 매입, 수도원 건물을 신축했고 1910년에는 진출 목적대로 숭공학교를 세워 실업교육을 실시했다. 1911년에는 숭신학교(동성중고등학교 전신)도 설립, 사범교육을 시작했으나 일제의 탄압 등으로 폐교하게 됐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숭공학교는 목공 철공 원예 등 7개 부문의 기술을 가르쳐 장안의 명문으로 부상했다.

이 시기에 서울수도원은 교황청으로부터 한반도 동북부와 만주 지방 선교라는 사명을 부여받게 된다. 함경남북도와 간도 지방 관할 원산 교구 설정에 따른 것이었다. 이로써 서울수도원은 숭공학교를 폐교하고 1927년 함경남도 덕원으로 모두 이전했다.

서울수도원의 덕원 이전은 수도원 생활에서 직접 사목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수도원 틀 안에서 학교를 운영하며 수도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새로운 광활한 선교지에서 본당을 세우고 사목하는, 직접 선교의 전선에 나서야 하는 상황을 맞는 것이었다.

덕원으로 옮긴 수도자들은 덕원 신학교를 건립하고 독일 툿찡의 포교 성베네딕도회 수녀들을 초청, 본당사목 활동및 학교사업 시약소 운영, 유치원 개설 등의 활동을 이어나갔다. 덕원수도원은 원산 지역에서 수도생활과 문화적인 중심이 됐으며 신학교 운영뿐 아니라 본당 사목 활동 등 많은 일들을 감당해 냈다. 1940년 덕원 면속구 설정과 더불어 원산교구는 함흥교구로 개칭됐고 덕원수도원은 출판시설을 갖춰 교리문답 성가집 미사경본 등의 책자를 발간하는 등 문서를 통한 신자들의 신심 고취에 앞장섰다.

한편 만주 간도지방이 원산교구 관할에 들어가면서 용정을 비롯 연길 지방에 새로운 본당 건립이 요청됐다. 지역내 한국인, 중국인 신자들에 대한 적극적 사목이 필요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베네딕도회 회원들은 용정 연길 등지에 본당을 건립하고 사목에 나서는 등 새로운 수도원의 틀을 만들었다. 연길수도원은 또 스위스 캄의 베네딕도회 올리베타노 수녀회를 초대해 수녀원을 세우고 이들과 함께 의료 여성 교육 사목에 전력을 기울였다. 수도생활 정착을 위해 독일인 수사들이 파견돼 목공 철공 분야 일을 하는 한편 인쇄소를 설립해 소년 잡지를 비롯 교회 서적을 인쇄 보급하는 등 문서 선교를 위해서도 노력했다.

그러나 이 두 수도원은 2차대전의 종료와 함께 소련군과 공산당 치하에 들어가면서 선교 활동이 제한받은 것은 물론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체포돼 처형당하거나 포로수용소에 수용되는 고초를 겪었다.

당시의 선교 성과를 되짚어 보면, 무엇보다 교육 사업을 통한 선교의 활성화 그리고 여성교육에의 헌신을 지목해 볼 수 있다. 특히 각 수도원에서 베네딕도회 수녀들을 초청, 이상적인 팀워크를 통해 교육 의료사업에 투신했다고 볼 수 있다. 덕원수도원은 신학교를 운영하면서 성직자 양성과 신학 발전에 힘썼으며 연길수도원은 활발한 포교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각종 미사경본과 교회 서적 등을 출판하여 한국교회 전체에 보급, 신자들의 적극적인 전례 참여를 도왔고 특히 연길교구에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 개혁에 앞서 신자들을 향한 미사집전을 시도하는 등 전례 개혁과 실천에 앞장섰다. 한국어로 하는 본당 성무일도도 실시했는데 이는 미사 전례가 본당 공동체를 결집시키는 중심이 돼야 한다는 취지였다. 이들 수도원을 통한 베네딕도회 회원들의 활동은 현재 한국교회 전례발전에 초석을 마련했다는 평이다.

한국의 서울 덕원·연길수도원의 역사는 오딜리아 연합회내에서도 ‘안으로는 수도자, 밖으로는 선교사’를 사는, 선교와 수도생활을 겸하는 선교 방법론적 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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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1-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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