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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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3주년기획/1부 땀의 순교자 최양업, 다락골에서 배티까지] <1> ''미지의 땅 마카오로 향하다''

''홍안의 소년'' 최양업, 첫 신학생으로 뽑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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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을 계기로 한국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그리고 증거자 최양업 신부에 대한 시복의 기대가 커지고 있다. 이들 가경자 125위의 조속한 시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들의 성덕과 순교 정신을 드높이는 기도ㆍ현양운동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현재 교황청에 이들 가경자 125위에 대한 시복 안건을 접수한 상태에 머물러 있고, 후속 현양 움직임은 미흡하다. 다만 올해 선종 150주기를 맞는 최양업 신부에 대한 현양운동이 일부 교구에서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평화신문은 창간 23주년 기획으로 한국교회 가경자들의 조속한 시복을 열망하며 `하느님의 종 125위, 복자 반열에`시리즈를 시작한다. 1부에서는 오는 6월 15일 선종 150주기를 맞는 최양업 신부의 사목과 삶, 신앙, 기도생활, 순례여정, 성덕, 영성을 통해 오늘을 사는 한국교회를 되돌아는 `땀의 순교자 최양업, 다락골에서 배티까지`를 5회에 걸쳐 싣는다. 이어 2부로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삶과 영성을 새기는 기획을 연재한다.


 
▲ 최양업 신부 생가가 있는 청양 다락골성지 성당.
2008년 축복식 당시 성전 모습으로, 작지만 단순하고 질박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 청양 다락골 줄무덤 성지로 들어가는 산 초입에 세워진 순교자 동상.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 자비를 잊지 마소서. 저희 눈이 모두 당신 자비에 쏠려 있습니다. 저희의 모든 희망이 당신 자비 안에 있습니다.…`

 박해의 칼날이 다시 교회를 향했다. 유일한 조선인 탁덕(鐸德, 사제의 옛말) 최양업(1821~61)은 박해의 포위망을 빠져나가며 스승 리브와, 르그레즈와 신부 등에 급히 열아홉 번째 서한을 쓴다. 그 편지가 1860년 9월 3일자로 보낸 최 신부의 마지막 서한이었다. 한국교회 첫 번째 신학생이었고, 두 번째 사제였으며, 첫 번째 해외선교사였고, 박해의 미친 피바람 속에서도 조선 5개도를 돌며 12년간 사목한 땀의 순교자 최 신부의 기도는 그리도 애절했다.

 서한에서 최 신부는 바람 앞 촛불 같은 조선교회를 주님 자비에 맡긴다. 이어 이듬해 6월 15일 그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끔찍한` 박해에도 무려 12년이나 조선 땅을 돌며 교우들을 사목하느라 애면글면했던 조선인 사제의 눈물겨운 삶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1836년 2월 6일. 경기도 부평에 살던 16살 `홍안의 소년` 최양업(토마스)은 서울 후동(현 을지로 3가 인근 주교동)에 거처를 두고 사목하던 피에르 모방 신부의 집에 도착한다. 조선에 입국한 첫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인 모방 신부가 주위 조선 교우들 추천으로 선택한 첫 번째 신학생이었다. 이어 3월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7월 김대건(안드레아)이 각각 신학생으로 합류했다.

 세 소년은 그해 12월 2일(종전엔 3일로 알려져왔으나 최근 2일로 확인됨) 모방 신부 앞에서 서약을 한 뒤 이튿날 조선교회 밀사 정하상(바오로)과 조신철(가롤로)ㆍ이광렬(요한) 등과 함께 서울을 떠나 6개월 만인 1837년 6월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조선대목구 신학교에 도착한다. 이로써 세 소년은 이국 땅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유학 생활의 첫발을 내딛는다.


   #새터 교우촌에서 7살까지 살아

 다락골성지에 이른다. 내포교회(대전교구) 한복판 `신앙의 꽃`과도 같은 성지다. 행정구역으로 보면,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성지는 크게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새터와 줄무덤 성지다. 새터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최양업 신부 부자의 생가가 자리하고 있고, 새터에서 2㎞쯤 산속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줄무덤엔 1866년 병인박해 때 홍주(현 홍성)와 공주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 줄 무덤 37기가 늘어서 있다.

 2008년 11월엔 대전교구 설정 60주년을 맞아 성지에 기념성전이 세워졌다. 지상 2층에 건축 연면적 2511㎡(760평) 규모로 비교적 작지만 단순하고 질박한 성당이다.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숨결과 치열한 신심, 더불어 넉넉한 사랑이 배어나는 듯하다.

 그러나 190년 전, 다락골은 전혀 달랐다. 박해 손길이 계속 뻗쳐오는 교우촌이었다. 1791년 신해박해로 수난을 당한 최경환 성인의 부친 최인주가 모친, 가족과 함께 서울에서 낙향해 자리를 잡은 뒤 1600년대 초 새터에 터전을 잡은 경주최씨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 집성촌은 교우촌이 됐다.

 기해박해 때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피신해 있던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모방 신부의 마지막 편지, 샤를르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 등에도 계속해서 다락골(혹은 다리골, 다래골)이 언급되고 있다.

 이 유서깊은 교우촌에서 1821년 최양업이 태어난다. 최경환 성인과 `하느님의 종` 이성례(마리아) 사이에 맏이로 태어나 새터 교우촌에서 7살까지 살았다.

 1827년께 부친을 따라 서울 낙동으로 이주한 최 신부 일가는 강원도 김성, 경기도 부평을 거쳐 1838년 무렵에는 과천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



가톨릭평화신문  2011-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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