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성 베네딕도회 <2> 왜관수도원 (상)

교회 건축·전례 발전에 새바람 일으켜/ ‘피란 수도원’서 대수도원 면모 갖춰/ 경북 서북부 6개군 본당 사업 펼쳐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 1957년 왜관수도원 전경. 오른편 언덕 위 수도원 본관이 들어서 있고 가운데는 왜관성당 모습이다.
왼편에는 마오로 기숙사가 자리하고 있다.
 

베네딕도 수도회의 100여 년 한국 진출 역사 안에서 왜관수도원 생활은 59년을 차지한다. 그만큼 6·25 이후 한국교회 안에 보다 본격적으로 베네딕도 수도회의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시기였다 할 것이다.

왜관수도원의 설립은 덕원수도원의 ‘피란 수도원’ 성격으로 시작됐다. 당시 남한에 피란중이던 회원들은 38선이 계속될 것이라는 생각도, 지속적으로 남북 분단이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갖지 못한 채 상황이 호전되는 대로 다시 덕원으로 돌아간다는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51년 미국을 방문 중이던 오틸리엔수도원의 크리소스또모 총아빠스는 이디모테모(비테를리) 신부에게 월남한 덕원과 연길교구 신학생들 및 수사들을 모아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토록 지시했다. 당시 남한으로 피신한 한국인 베네딕토회 회원들은 대구 주교관에서 공동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이디모테오 신부는 원장신부 임명을 받고 대구교구청에서 지내던 한국인 수사들과 함께 1952년 7월 6일 대구교구로부터 위임받은 낙산성당(후에 가실성당)과 왜관성당에 정착했다. 왜관수도원의 본격적인 시작이 마련된 것이다.

스위스 국적이었던 이디모테오 신부는 독일인 수사들이 덕원수도원에서 체포될 때 중립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풀려났다가 미국 뉴튼 수도원에 머물고 있던 중 남한 공동체 원장 임명을 받았다.

이때부터 1964년까지 12년 정도의 시간은 왜관수도원이 기초를 세우고 설립 토대를 굳건하게 만든 시기라고 수도회측은 설명한다.

당시 왜관수도원에 합류한 구성원들은 덕원수도원 소속 신부 수사들에서부터 50년대 이후 파견된 독일인 수도자들, 덕원 및 연길수도원 소속이었다가 이북이나 만주에서 수용소 생활을 한 독일인 수도자 등 일곱 부류로 분류될 만큼 다양했다.

1953년 왜관지역이 감목대리구로 설정되는 동시에 이디모테오 신부는 감목대리로 임명됐는데 이로써 왜관수도원은 ‘왜관 감목대리구’를 인적 물적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선교본부 성격을 띠었다.

1955년 수도원 건물이 세워진데 이어 1956년 로마로부터 정식 수도원 인가를 받은 왜관수도원은 더불어 대구교구로부터 3개 군의 사목 권한을 새롭게 위임받아 경북 서북부 지역 6개군의 본당 사업을 중심으로 활동을 펼치게 된다.

당시 왜관수도원은 원활한 구호물자의 배급, 독일에서의 경제적 지원, 회원들의 열성적 노력으로 그 어느 곳보다 선교가 활성화 됐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69년 안동교구 설립 당시 관할 지역이던 문경군과 상주군을 넘겨 주었는데 1만8000명의 교구 신자 중 문경과 상주 2개 군의 신자수가 1만 명 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왜관수도원을 통한 복음화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본당과 신자수가 급속히 늘고 수도회 회원들도 크게 늘어나면서 왜관수도원은 대수도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고 1964년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하게 된다. 피란수도원의 성격을 접고 명실공한 대수도원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해 2월 17일 오 도환(O.Hass) 신부가 초대 아빠스로 선출됐고 왜관수도원은 완전한 자립 수도원이 되었다. 33세 젊은 나이로 초대 아빠스에 선출된 오 신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가는 시기에 맞춰 그에 따른 새로운 신학 특히 전례 정신을 한국교회에 보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덕원 연길에서의 출판 사업 전통을 이어서 1960년 설립된 분도출판사와 인쇄소는 기도서 전례서등을 출판하는 등 문서 선교 활성화에 크게 이바지 했을뿐 아니라 공의회 문헌들을 번역 출간하고 신학 저서들을 교회에 보급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1964년에는 왜관 피정의 집 건립으로 한국에서 처음 피정센터 운영을 시도, 피정 시설로서 뿐만 아니라 전례와 신학을 널리 교육하는 장을 만들었다. 왜관 피정의 집은 그 자체로도 한국교회 전체에 큰 자극이 되었고 이후 많은 피정의 집이 건립되는 촉매제가 되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 개혁 정신의 구현을 위해 미사 전례 개혁에 착수했던 왜관수도원은 1964년 주례자용 ‘미사봉독서’를 펴내는 한편, 1964년 예수성탄대축일에 처음으로 공동집전 미사를 봉헌했다. 왜관 피정의 집에서는 전례 연수가 열렸고 왜관본당은 본당 전례 실습 모델이 되었다. 수도원 성당에서는 미사 공동 집전의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교회 건축 면에서도 한국교회 안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기존 성당 건물들이 단순 벽돌 건물로 지어진 것이었다면, 베네딕도회는 콘크리트로 된 성당과 사제관을 현대식으로 건축함으로써 성당 건축 방향을 진일보 시켰다.

또 철공소 목공소 같은 작업장 건설과 현대식 농장 경영은 수도원의 자급자족에 도움을 주는 한편, 농장 경영의 현대화로 지역사회 발전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이외에 왜관 순심중고등학교를 인수, 성마오로 기숙사를 운영하면서 청소년 교육 분야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초기 왜관수도원의 모습은 외형적인 새 수도원을 짓는 것이 아니었다. 연길 덕원수도원의 전통과 정신 인맥을 이어받아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사도’라는 모토를 다시 한 번 새롭게 한국교회 안에 구축하는 작업이었다.
 

 
▲ 1965년 1월18일 왜관 피정의집 축복식을 마치고 대구대교구 서정길 대주교 및 주교단, 그리고 오도 하스 아빠스 공동 집전으로 미사가 봉헌되고 있는



가톨릭신문  2011-06-26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28

시편 92장 2절
주님을 찬송함이 좋기도 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여, 당신 이름에 찬미 노래 부름이 좋기도 합니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