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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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땀의 순교자 최양업, 다락골에서 배티까지] <5> 11년6개월,짧고도 긴 순례 여정을 마치고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숨 거둔 ''땀의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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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글 싣는 차례
① 미지의 땅 마카오로 떠나다
② 조선 땅 배티로 돌아오다
③ 조선 5개도를 본당사목구로
④ 교우촌으로 향하는 길 위에 서다
⑤ 11년 6개월, 짧고도 긴 순례 여정을 마치고





   "저 혼자 여행을 하기엔 너무 허약합니다. 하루에 고작 40리(16㎞)밖에 걷지 못합니다. 갈 길이 먼 공소순방 때는 그래서 말을 타고 갑니다."(최양업 신부 1859년 10월 12일자 서한)


   #낮에는 걷고 밤에는 성사 집전

 날이 갈수록 최양업 신부는 쇠약해지고 점차 지쳐갔다. 12년간 해마다 2749㎞(7000리)씩 걸어 교우촌을 순방하는 강행군 때문이었다. 낮에는 대략 31.4~39.3㎞(80~100리)를 걷고 밤에는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날이 새기 전에 다시 길을 떠나는 과로가 그의 몸을 서서히 갉았다. 한 달 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날이 겨우 나흘 밤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목구역은 5개 도에 걸쳐 있었고, 충청ㆍ전라ㆍ경상 삼남(三南)지역 가운데 벽지와 오지는 거의 그의 차지였다. 최 신부는 1859년 말 시작돼 1860년 여름까지 이어진 경신박해로 성사 집전이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에서도 밤마다 교우촌을 옮겨 다니며 신자들을 보살폈다.

 박해가 심해 어쩔 수 없이 죽림(경북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대밭공소)에 갇혀 지내다시피 했던 최 신부는 박해가 잦아들자 다시 공소 순방에 나섰다. 사목 순방을 하느라 성무집행 연말보고조차 늦춰졌을 정도로 바삐 움직였다. 그 성과는 풍요로웠다.

 최 신부가 1860년 9월 3일자로 스승 신부들에게 보낸 열아홉 번째 서한에 따르면, 고해성사를 본 신자가 1622명, 세례성사를 받은 이가 203명이었으며, 예비신자도 398명이나 등록했다.


 사목보고를 한 뒤로도 최 신부는 10개월 간 공소 순방을 하느라 거의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그런 몸을 이끌고 그는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순방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지만 무리였다. 피로가 겹친 데다 장티푸스에 걸린 최 신부는 마침내 쓰러진다. 그리고 푸르티에 신부에게 마지막 사죄경과 함께 병자성사를 받고나서 양떼를 따스하게 붙잡아주던 손을 내려놓고 숨을 거둔다. 흩어진 양떼를 찾아 성사의 은총을 전해주느라 길에서 산 `땀의 증거자`의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 그들과 함께할 수 없음에, 더 도울 수 없음에 자책하던 목자는 의식이 없으면서도 "예수, 마리아"를 반복해 중얼거리며 자비한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토록 최 신부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교우들은 참 목자를 잃은 슬픔에 목이 멨다. 1861년 6월 15일, 그의 나이 41살이었다. 그리고 유해는 선종지에 가매장됐다가 훗날 배론에 안장됐다. 1849년 말 부푼 `희망을 안고` 조선에 발을 내디딘 지 꼭 11년 6개월 만이었다.

 마지막 서한을 통해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하다"며 죽음을 예감하던 최 신부 기도는 참으로 애절하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마소서. 저희 눈이 모두 당신의 자비에 쏠려 있습니다. 저희의 모든 희망이 당신의 자비 안에 있습니다.…" 최 신부의 열절한 기도는 여기에서 멈춘다.


 
▲ 배티성지 내 산상제대로 오르는 길목에 세워진 최양업 신부의 동상.
`길의 사도`이자 `땀의 증거자`로 산 최 신부의 삶을 형상화하고자 성경을 끼고 지팡이를 짚은 채 걸어가는 형태로 제작했다.

 최 신부 선종지는 아직 미궁에 빠져 있다.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는 푸르티에 신부 서한과 페롱 신부 서한이 최 신부가 선종한 땅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어서다.

 최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준 푸르티에 신부는 1861년 10월 21일자 서한을 통해 "그가 누워있는 집이 저의 거처(배론신학교)에서 170~180리(66.8~70.7㎞) 떨어져 있었다"거나 그해 11월 2일자 서한에서 "그는 중병에 걸려 제가 살고 있는 산(배론 구학산)에서 170리(66.8㎞) 떨어진 어느 한 교우의 집에 간신히 도착했다"고만 언급한다.

 또 페롱 신부도 같은 해 서한을 통해 최 신부가 선종한 것이 "배론신학교에서 약 120리(47.1㎞) 떨어진 한 작은 교우공동체"라고 언급할 뿐이다. 19.6㎞(50리)라는 거리 인식의 차이는 신학교 교장으로 있던 푸르티에 신부와 교우촌 순방 길에 익숙했던 페롱 신부가 달려간 노선이 달랐기에 벌어진 현상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와 함께 `최 바시리오 이력서`(1939년) 등을 비롯한 문헌과 구전 등을 통해 최 신부 선종지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최 신부 선종지는 경상도 문경으로 보는 설(주재용 신부, 정양모 신부 등)이 유력하지만, 충청도 진천으로 보는 견해(류한영 신부 등)도 만만치 않다. 또 최 신부 발병지와 선종지를 구분해 발병지는 문경이 분명하지만, 선종지는 진천 배티라고 주장하는 설(정규량 신부)도 있다.

 다만 `대동여지도`나 요즘 항공촬영 축적 지도를 통해 분석해본 결과, 최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준 푸르티에 신부가 배론신학교에서 이동한 거리가 170~180리였다는 기록은 배론에서 문경읍까지 실측결과가 거의 일치해 문경선종설이 타당하다는 주장이 더 힘을 얻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1-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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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교구 배론성지 최양업 신부 묘역.
묘소 앞에는 길이 1m51.5㎝(5자), 너비 60.6㎝(2자) 빗돌이 세워져 있으며, 앞면에는 `사제 토마스 최정구(최양업 신부의 아명)의 묘`라는 글이 새겨졌고, 뒷면에는 최 신부의 사목적 삶을 기리고 빗돌을 건립한 내역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