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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 - 성 최형 베드로

‘성교일과’등 교회서적 간행/ 묵주제작·인쇄소 설립에 기여/ 페레올 주교 등 조선 입국 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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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최형 베드로
 

김대건, 최양업과 함께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던 최방제. 청운의 뜻을 품고 바다를 건넜다가 안타깝게도 병사한 그를 우리는 기억하면서도, 그의 형인 최형(베드로)을 기억하는 이는 사실 손에 꼽기조차 어렵다. 오히려 최형이 최방제의 형인 사실도 모르는 이가 더 많을 것이다.

충청도 공주에서 최인호(야고보)와 황 안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03위 성인 가운데 하나이고,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 하지만 최형 성인을 더욱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성교일과’와 ‘성찰기략’ 등의 교회서적을 간행하고 묵주를 제작해 교회를 도왔으며, 훗날 교회서적 출판의 책임자가 돼 큰 공로를 남겼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운 최방제와 최형 형제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격동의 삶을 살았다. 누이는 동정녀로 생활하다가 1856년경 죽었으며, 큰 형 최수(베드로)는 1866년 양화진에서 참수됐다.

1836년 입국한 모방 신부는 최방제를 신학생으로 선발함과 동시에 그의 형 최형을 복사로 삼았다. 최방제와 최형의 운명도 이곳에서 갈린다. 최형은 2~3년간 모방 신부의 복사직을 수행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신자들과 체포됐다.

하지만 다행히 돈만 빼앗긴 채 풀려난 그는 1845년 입국한 우리나라의 첫 번째 사제 김대건 신부를 도와 이듬해 10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입국까지 돕는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1846년 병오박해 때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자 그는 아예 상경해 다블뤼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며 목수가 돼 생활하다가 시간이 있을 때면 종교 서적을 베끼고 묵주를 만들었다. 1856년 베르뇌 주교가 입국하자 교회를 위한 최형의 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베르뇌 주교의 명에 따라 서울에 인쇄소를 세운 그는 ‘성교일과’ ‘성찰기략’ 등 교회서적 다수를 간행하고, 비록 회장은 아니었지만 베르뇌 주교로부터 대세를 주는 권한까지 부여받았다. 또 자신의 집에 머물던 이덕보(마태오)에게 행랑을 내주어 학당을 마련해 교우 자녀들을 가르치게 배려하기도 했다.

1866년 병인박해, 최형 역시 박해의 칼날을 피해가지 못하고 1월 5일 체포됐으며, 신문 중에 신앙을 증거하다가 2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전장운(요한) 등과 함께 참수형을 받았다. 1868년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됐고, 1984년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축일은 9월 20일이다.


오혜민 기자 (oh0311@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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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1-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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