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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전주교구 전동본당

순교신심 불지핀 교구 신앙의 요람/ 한국 역사·문화사적으로도 유서 깊어/ 유항검·이순이 동정부부 등 현양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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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전동성당의 모습.
 

끝이 새로운 시작이 됐다.

1791년 전주 풍남문 밖. 희광이가 휘두른 칼에 목이 떨어져나갔다. 한국교회 첫 순교자들이었다. 그로부터 꼭 100년이 지난 1891년, 그들이 피 흘린 자리는 성당터로 닦여졌다. 이어 23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전동성당이 첫 모습을 드러냈다. 전주 시내에서는 처음으로 지어진 성당이었다.

전동성당은 교회사적으로는 물론 한국 역사·문화사적으로도 유서 깊은 자리에서 120여년의 시간을 변함없이 이끌어오고 있다. 담장 없이 열린 성당은 맞은편 경기전, 그 옆 한옥마을과 이어진다. 외적인 아름다움도 빼어난 로마네스크식 건축물인 전동성당은 전주시민은 물론 수많은 관광객들이 꼭 한 번 들르는 필수코스이기도 하다. 본당(주임 김용태 신부)은 지난 2002년 성당 담장을 허물고 누구나 쉽게 오갈 수 있도록 열린 공간의 면모를 갖췄다. 특히 올해부터는 성지순례객들과 일반인들을 위해 매월 셋째 주일 오후 3시30분 교회음악의 아름다움과 미사 전례의 거룩함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성음악 미사로 봉헌하고 있다.

한국교회 순교 1번지. 그 역사를 돌아본다는 것은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을 보다 정확히 가늠하기 위해서도 의미가 크다. 교구 신앙의 요람으로서 넉넉함을 품고 있는 본당의 역사는 1889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동본당(당시 전주본당)은 수류본당과 같은 1889년 봄에 설립됐다. 하지만 초대 본당 주임인 보두네 신부는 곧 바로 전주 시내에 들어오지 못했다. 전주는 개항지가 아니었고 시내에는 신자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박해의 여파가 남아 신자들은 대부분 산골 등지에서 생활, 신부의 거처를 평야나 도회지에 마련하기에는 어려움이 컸다.

1891년 현재의 성당터를 잡고도 선교활동이 쉽지만은 않았다. 지방 권력층이 시시때때로 탄압하는 것은 물론 보수적인 주민들은 서양인이 고향땅에 머무르는 것조차 싫어하곤 했다. 하지만 복음말씀은 금세 퍼져나가 1900년대 초에는 전라북도 지방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본당이 설립된 지역으로 꼽혔다. 1937년 한국교회에서 처음으로 자치교구로 전주교구가 설정되자 전동본당은 주교좌가 됐다.

전동본당의 역사를 되돌아보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이 바로 유항검 일가다.

‘호남의 사도’로 불리는 유항검은 1784년 가을, 경기도 양근에 있는 권철신의 집을 찾아갔다가 천주교 서적 등을 처음 접했다. 이어 권철신의 아우인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운 유항검은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고, 고향에서 폭넓은 선교활동을 펼침으로써 그의 고향 초남이는 호남지방 교회의 주춧돌이 됐다.

전동본당 신자들은 설립 초기부터 유항검을 비롯해 그의 아들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의 순교 신심을 현양하는데 각별한 정성을 보여 왔다. 순교신심의 파수꾼 역할을 자청했던 본당 신자들은 특히 1914년 사순절, 초남리에서 유항검 일가의 유해를 발굴해 성당에 모시면서 순교자 현양에 본격적인 힘을 실었다. 신자들은 보다 많은 이들이 유항검 일가의 신심을 본받도록 돕기 위해 이들의 묘소를 치명자산 정상에 마련했고, 좀도리쌀과 현금 모금 등을 통해 교구 내 성지 조성에도 자발적으로 나섰다. 당시 교회 언론도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국내에는 이외에도 역사적 순교지를 가진 곳이 많지만, 전주처럼 그 기념지를 교회 소유지로 만들고 순교자 무덤 앞에 훌륭한 기념비를 세워 정신을 표시하는 도시는 아직 없다. 이 점으로 보아 전주 교우들은 가장 진보적인 정신을 가지고 모범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할 것이다”라고 소개한 바 있다.

본당 역사에서 또 한 가지 눈길을 끄는 것은 성체를 공경하는 신자들의 모습이다. 본당 또한 어린이들을 위한 ‘어린 아해의 성체조배’ 책까지 간행하며 성체신심 고양에 힘이 됐다.

굴곡의 역사 안에서, 전동본당도 여느 본당들과 마찬가지로 일제 치하에서 고통을 겪는 이들, 특히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데 앞장서는 모범을 보였다. 본당은 우선 해성강습소와 해성학원을 세워 교육에 나섰다. 이어 1932년에는 해성심상소학교(해성국민학교)도 개소했다. 또 본당 신부를 중심으로 한글보급운동에 나서며 일제의 탄압을 이겨 내왔다. 해방 후엔 일제에 징발됐던 해성국민학교를 회수해 여학생들을 위한 중등교육기관인 성심여중학교의 문도 열었다. 1947년에 설립한 성심유치원도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1970~80년대를 거치면서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교육의 장, 전북지역 민주화의 구심점으로 그 뜻을 더욱 탄탄히 해왔다.

현재 성당은 사적지 288호로, 사제관은 지방문화재 제178호로 지정돼 있다. 주교좌는 1957년 중앙본당으로 이전됐지만, 전동본당은 여전히 교구의 어머니와 같은 구심점으로 깊은 뿌리를 키워나가고 있다.
 
 

 
▲ 1952년 6·25 한국전쟁 중이었으나 본당은 교회의 건재함을 보이고 흐트러진 신자들의 신심을 북돋우기 위해 오목대에서 전동성당까지 이어지는 성체거동을 봉헌했다.
 



가톨릭신문  2011-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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