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성베네딕도회 <3> 왜관수도원 (중)

한국교회 복지·교육·문화 사업 발전에 공헌/ 1971년 베네딕도회 첫 한국인 장상 탄생/ 결핵요양원·출판사·순심중고교 등 운영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 2009년 9월 25일 봉헌된 한국진출 100주년 기념미사중 이형우 아빠스가 오틸리엔수도원이 한국 진출 100주년을 기념해 영구 임대 방식으로 반환했던 겸재 정선의 화첩의 모사본을 오틸리엔 수도원장 예레미아스 슈뢰더 총아빠스에게 전달하고 있는 모습.
 

1971년 이동호 플라치도 아빠스의 왜관수도원 제2대 아빠스 취임은 베네딕도회 역사상 최초의 한국인 장상 탄생이라는 기록을 낳았다.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진출한지 62년만의 일이었다.

이것은 당시 한국교회 상황에서 외국서 설립된 수도회들 중 최초로 방인 장상을 갖게 되는 사건이었으며 수도회 내적으로는 한국인이 국제적 공동체에서 동등하게 대접받게 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독일인 아빠스가 물러나고 한국인 장상이 출현하게 된 배경은 당시 한국의 정치 경제 상황과도 관계가 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보리고개’라는 용어가 없어지고 새마을 운동 등 영향으로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생길 만큼 경제적인 성장을 거두며 전반적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시점이었다. 또한 교회적으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으로 ‘현지 교회의 정신적 사회적 발전에 적응할 것’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전임 오도 아빠스의 사임을 두고 당시 ‘가톨릭시보’로 발행됐던 본지는 “…베네딕도회는 그들이 교육시킨 젊은 한국인 형제들이 성년이 되자, 경험이 부족한 이들에게 감독권을 넘겨주었다. 제자에게 자기 자리를 내주는 스승의 기쁨을 분명 느끼리라. 스승은 제자가 올바른 스승이 되기를 원할 것이다…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계속 한국교회의 정신적 지주가 되기를!”이라고 평했다.

또 분도통사에서는 “이동호 플라치도 아빠스의 취임으로 한국 베네딕도회의 역사는 한국사가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 의미대로 이동호 아빠스는 이전의 수도원 사업들을 계속해서 성실히 발전시켜 나갔으며 자립 수도원을 목적으로 했던 부산 수도원을 분원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분도출판사 분도인쇄소를 분리 확장시켜 교회 출판사업을 진작시켰고 연화리 결핵요양원을 설립하는 한편 순심 중고등학교를 확장하고 농장사업을 시작 발전시키는 일도 추진했다. 한국인에 의한 베네딕도회 역사가 새롭게 쓰여지는 시기였다.

1971년부터 1985년까지 14년 동안 왜관수도원 수장을 맡았던 이동호 아빠스에 이어 이덕근 아빠스가 제3대 아빠스에 선출됐다.

이 시기에는 수도승 생활이 강조되었고 1987년 3월 19일에는 서울 근교 불암산 기슭에 단순한 노동으로 기도생활에 전념하며 베네딕도회적 삶을 지향하는 성 요셉 수도원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1995년 이덕근 아빠스의 사임에 따라 왜관수도원은 이후 6년 동안 두차례 선거를 치렀지만 아빠스를 선출하지 못하고 관리원장 체제를 지냈다. 이 같은 상황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100주년 기념을 위한 준비들이 시작됐고 월간지 ‘둘숨날숨’이 창간 됐으며 ‘봉헌회’가 설립되는 등 내외적인 성장과 기반을 더욱 탄탄히 쌓아올리는 시대를 보낸다.

6년간의 관리원장 체제후 2001년 9월 11일 제4대 아빠스로 선출된 이형우 새 아빠스가 축복식을 가짐으로써 왜관수도원은 새로운 도약의 근거를 마련한다.

한국교회 전체의 축복과 기대를 안고 이형우 아빠스 시대로 출범한 왜관수도원은 2001년 10월 참사회를 통해 미국 뉴저지 뉴튼수도원을 인수하기로 결정함으로써 한국 베네딕도회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이른다.

이는 한국 진출 100주년을 앞두고 내외적인 성장 모습을 한국교회 안팎에 드러내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2001년 12월 김구인 신부를 원장으로 6명이 파견된 뉴튼수도원은 2004년 원장좌 예속수도원으로 승격되는 발전을 이뤘다.

한편 한국진출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영성 전례 역사 건축 등 4개 분야로 준비하는 기념 행사 방안이 마련됐으며 2006년 11월에는 광주에 화순 수도원이 신설됐다.

2007년에는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와 동료 35위 시복 절차’를 시작했다. 2009년 8월 30일, 2007년 화재로 소실됐던 수도원 건물의 성전 봉헌식을 가졌고 2009년 9월 25일 왜관수도원은 마침내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주례로 한국 진출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 한국 베네딕도회 200주년을 향한 거보를 내디뎠다.

현재 왜관수도원 산하에는 원장좌 예속 수도원으로 요셉수도원과 뉴튼수도원이 있으며 서울 대구 부산 화순 등 4개 분원이 있다. 2011년 2월 현재 총 회원수는 145명이다.

■ 왜관수도원의 주요 활동

1909년부터 시작된 베네딕도회의 한국교회내 활동은 한국 역사와 시대 상황 안에서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도직을 찾아 수도회의 역량을 쏟아왔다고 볼 수 있다.

수도회 관계자 표현대로 성경에서 밝히는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이들의 여러 활동과 사업들은 한국 교회의 교육 문화 사회복지 사업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이 됐다. 그 주요 내용들을 정리해 본다.

- 복지사업

왜관수도원은 나환자들에 대한 편견과 인식이 저조하고 복지 상태가 열악했던 50∼60년대 상황에서 왜관삼청동, 상주, 문경, 성주용봉 등 네 개 지역에 음성 나환자 정착촌을 운영하면서 이들의 자립을 위해 노력했다.

수도원은 이들이 자립하는 것을 원칙으로 그에 따른 지원 활동을 아끼지 않았다. 현재 이 정착촌들은 모두 자립한 상태다. 특히 김태규 신부는 미감아들 교육을 위한 ‘5·8 장학회’를 설립 운영하기도 했다.

1975년 칠곡 연화리에 설립한 결핵요양원 마련도 눈여겨 볼만하다. 폐결핵 역시 60∼70년대 당시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환자들의 적절한 치료와 돌봄이 이루어지지 않던 처지였다. 이 요양원은 수도원에서 운영하다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에 관리가 이양됐다.

이외 무의탁 노인들을 위해 시작됐던 선산 성심양로원과 분도 노인마을은 노인 복지사업의 원류가 되었고 구미공단 미혼 여성 근로자들의 복지 상담소로 시작했던 구미 여성근로자 복지센터는 지역 근로자들의 인권과 복지를 위한 자리가 됐다. 이 센터는 2000년대 들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쉼터와 배움터로 자리매김 했다.



가톨릭신문  2011-07-10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28

요한 10장 11절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