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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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대전교구 합덕본당

내포지역 신앙 구심점으로 자리매김/ 매괴학교 열어 애국계몽·전교 활동에 힘써/ 본당 내 순교자 무덤 안치해 순례지로 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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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인기 지상파 드라마의 배경으로 나온 성당 모습은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단아한 느낌의 내부는 물론 소박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벽돌식 외관은 많은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대전교구 합덕성당. 독특한 양식의 성당뿐 아니라 시원하게 펼쳐진 마당과 성모동산 등을 갖춘 이곳은 비신자들의 발걸음도 멈추게 한다. 빼어난 자태와 의연한 역사에 힘입어 충청남도 기념물 제145호로 보호되고 있기도 하다. 또 오래 전부터 인기 영화촬영지로 입소문이 나 성당 한쪽에는 영화 자료 전시공간도 마련돼 있을 정도다.

특히 성당을 중심으로 황무실과 신리성지, 솔뫼성지, 여사울성지 등이 사방 3~4km 이내에 위치, 내포도보성지순례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성당 내에는 합덕유스호스텔도 세워 일반 청소년들은 물론 신자 도보순례자들이 보다 편안하게 휴식하며 순교역사의 숨결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설립 당시 때부터 지금껏 줄곧 내포지역 교회 신앙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해온 합덕본당(주임 홍광철 신부), 그 뿌리를 들여다보면 신자로서 더욱 자긍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내포지역 교회 신앙의 못자리였던 합덕성당은 현재 내포도보성지순례의 중심지로 자리매김, 수많은 순례자들을 품고 있다.
충청도 지역에는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는 이존창(루도비코)의 노력에 힘입어 천주교 신앙이 스며들었다. 충청도 중서부 지역을 일컫는 이른바 내포(內浦)는 한국교회의 신앙못자리로 불릴 만큼 뛰어난 교세를 자랑하던 곳이다. 합덕본당의 초창기 관할 구역은 이존창이 활동하던 지역들과도 겹쳐진다. 이후 1860년대 초 베르뇌 주교가 전국을 선교사가 상주하는 8개 지역으로 나눌 때도 내포지역은 상부내포, 하부내포로 나뉠 만큼 신앙생활이 활발하게 이어지던 곳이었다.

조선과 프랑스의 수교를 통해 다시 돌아온 선교사들에게 내포지역 교회는 여전히 주목할 만한 곳이었다. 1890년 이 지역에는 양촌본당과 간양골본당 두 개 본당이 설립됐다. 하지만 간양골본당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본당 신부의 병으로 인해 폐쇄, 양촌본당은 이후 충청도 남부지역 본당들의 모본당으로서 지속적인 발전을 이뤄왔다.

현재 성당은 1898년 초대본당 주임인 퀴를리에 신부가 다시 터를 잡아 지었다. 본당은 새로 성당을 지으면서 이름도 ‘합덕’으로 변경했다. 1929년에야 빛을 보게 된 합덕성당은 당시로서는 매우 보기 드문 건축양식을 뽐냈다. 벽돌과 목재를 사용한 연와조 주고에 종탑도 쌍탑으로 세워진 것이 특징이다. 출입구와 창은 모두 무지개 모양이다.

사실 성당을 이전할 당시 주변에는 교우집이 2~3호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개종운동이 일어나고 신자들이 이주하면서 성당을 중심으로 교우촌이 탄탄하게 성장했다.

더욱이 성당은 넓고 비옥한 평야지대에 위치해 지역경제의 중심이기도 했다. 인근에는 서울대목구 소유의 농토도 광범위하게 분포해 있었는데, 용산신학교는 이곳에서 거둬들이는 소작료 수입으로 운영됐다. 당시에는 전국에서 용산신학교 입학생을 가장 많이 낸 본당도 바로 합덕이었다. 지금까지 본당에서 배출한 수도자 수는 100여 명, 사제 수도 40여 명을 넘어섰다.

본당은 지역사회에서 신교육을 발 빠르게 들여와 당진 지역 최초의 신교육기관을 설립한 주역이기도 했다. 본당은 1908년 매괴학교를 열어 애국계몽과 전교활동에 힘썼다. 특히 같은 시기, 지역 내 고아들을 신자들의 가정에 맡겨 본당이 양육비를 지급하며 기르게 하는 사회사업도 적극 펼친 바 있다. 1939년에는 돌보는 고아 수가 300명을 넘어서 이후 소화보육원도 설립, 운영했다. 본당 청년회의 발전도 독보적으로 평가된다. 청년회는 1922년에는 ‘경성구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에 가입해 다방면의 활동을 펼쳐왔다.

합덕본당의 뿌리를 돌아볼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부분이 순교지 매입과 성지개발에 들이는 정성이기도 하다. 성당에서 4km 거리에 위치하는 신리성지는 다블뤼 주교와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등이 거처한 곳이자, 수많은 순교자들이 난 성지다. 본당은 신앙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신리와 솔뫼성지 등을 개발하는 데에 지속적인 힘을 기울여왔다.

현재 본당의 큰 자랑 중 하나는 신앙의 모범이 되는 순교자들의 무덤이 성당 내에 있는 것이다. 덕분에 성당은 순교신심을 본받고자 노력하는 순례자들이 꼭 거쳐 가는 순례지로 꼽힌다. 또한 본당은 지난 2007년에는 김대건 신부의 다리뼈 일부분을 비롯해 앵베르 범라우렌시오 주교, 모방 나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야고보 신부의 머리카락 등의 유해를 성당에 모시기도 했다.

본당공동체가 구현하는 뿌리 깊은 신심은 지난 2007년부터 부활시킨 성체거동을 통해 더욱 빛을 내며 신자는 물론 지역주민들의 화합을 독려한다. 1957년까지 이어졌던 본당 성체거동도 신자들의 성체신심을 키울 뿐 아니라 지역주민들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지역신앙축제의 장이었다.


 
▲ 1947년경에 촬영한 장례행렬 사진으로 성당과 주변의 전경이 잘 드러나 있다.
 


가톨릭신문  2011-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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