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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 - 성 장주기 요셉

공소 회장으로 신앙의 모범 보여/ 열성을 다해 희생과 봉사의 삶 살아/ 성요셉 신학교에 자신의 집 내 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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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장주기 요셉
 

요당리성지의 장주기 요셉 성인 영성 홍보, 원주교구의 장주기요셉재활원, 수원교구의 장주기요셉관 등 아직도 ‘장주기 요셉’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다. 그만큼 한국 순교자 103위 성인 가운데 한 명인 장주기 성인의 생전 덕행과 덕망이 우리에게 모범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장주기는 1855년 배론(원주교구)에 성 요셉 신학교가 설립될 때, 신학생들의 양성을 위해 자신의 3칸짜리 초가집을 기꺼이 임시 신학교로 내어주고, 자신은 신학교 땅 한쪽에서 농사일을 하며 잔일을 도맡아 하기도 한 인물이다.

그의 이러한 희생정신은 1826년(또는 1827년) 세례를 받으면서부터 이뤄졌다. ‘장낙소’라고도 불리는 그는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화성군 양감면 육당리)에서 태어났으며, 세례를 받은 후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를 피해 충청도 제천 배론(원주교구)으로 이사했다.

학식이 있고 슬기로웠던 그는 신앙을 반대했던 거의 모든 집안 식구들을 개종시켰으며, 모방 신부의 추천으로 회장으로 선출돼 모범적 신앙 활동을 펼쳐나갔다.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가 생겨나면서부터는 학생들에게 직접 한문을 지도하기도 했으며, 신학교 경리, 주위에 있는 공소 회장의 역할 등까지도 함께 맡아볼 만큼 아낌없는 지원을 보냈다.

그는 여러 가지 직책을 맡으면서도 열성과 인내를 가지고 수행했으며, 가난했지만 자기 봉사에 대한 보수를 결코 받으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가를 이용해 자기와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일을 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터진 후 장주기는 제천 인근의 노럴골(또는 너레골)로 피신했지만,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선교사들의 집주인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포졸들에게 체포된 그는 서울로 압송돼 포청에서 모진 고문을 견뎌내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당시 홍주 거더리에서 끌려온 안주교, 민신부, 오신부, 황석두 등과 함께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삼남매였던 자식들에게 ‘항상 순교해 예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밝힌 장주기 요셉. 그의 소원대로 순교했던 당시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장주기 성인의 시신은 다블뤼 주교와 위엥·오메트르 신부의 시신과 함께 형장의 모래밭에 매장됐다가 후에 그곳에서 10리 떨어진 곳으로 이장됐는데, 일본 나가사키, 용산신학교 등 여러 곳을 거쳐 현재 절두산 지하성당에 이르고 있다.


오혜민 기자 (oh0311@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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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1-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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