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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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서울대교구 중림동 약현본당

믿음의 역사 계승하며 선교활동에 매진/ 순교자 발자취 체험할 수 있는 전시관 운영/ 교육사업·대사회적 복지활동에 적극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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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약현성당의 모습.
 

전국 각 지역 선교의 구심점인 본당. 각 본당 공동체들은 우리 민족 역사의 굴곡을 함께 헤쳐 나왔고, 전통문화와도 조화를 이루며 그 맥을 이어왔다. 특히 전통 건축기법과 서양식 건축기법을 혼용하거나, 일본문화의 간섭 없이 서양식으로 지어진 많은 성당들은 국내 주요 문화유산으로서도 가치를 인정받으며 보존되고 있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 이후 새로운 선교의 물꼬가 터진 무렵, 서울에도 처음으로 성당이 지어졌다. 103위 한국 성인 중 44명의 성인이 처형된 서소문 광장이 내려다보는 약현 언덕배기를 터로 삼았다. 아담하게 자리 잡은 성당을 둥지로 서울 지역 선교활동에 큰 힘을 실었던 중림동 약현본당(주임 정훈 신부)은 올해 설립 120주년을 맞아, 신자 개개인이 순교신심을 바탕으로 새로운 신앙의 봉사자로 거듭나도록 각종 기도운동과 기념행사 등을 펼치고 있다.



중림동 약현성당이 터를 잡은 곳은 한국교회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의 집 인근이었다. 서울 문 밖 수렛골이라 불린 이곳에는 꽤 많은 신자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이에 따라 선교사들은 이곳에 명동본당 소속의 공소를 설립하고 교리 강습소도 세웠다. 강습소를 찾는 신자들은 갈수록 늘어 1890년대 초 950명을 넘어섰다. 당시 종현(명동)본당의 신자 수가 586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만만찮은 규모였다. 본당으로 정식 설립된 것은 정두세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1891년의 일이다.

특히 약현본당은 모본당인 종현본당보다 5년이나 빨리 새 성당을 지어, 한국교회 역사를 품어 안았다. 건축 당시 ‘고종황제가 가마를 타고 공사현장을 둘러보았다’고 할 정도로 교회 안팎의 관심을 모았던 성당이었다. 약간 변형된 고딕양식의 이 성당은 비교적 작고 아담하게 삼랑식 평면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896년 이곳 약현성당에서는 한국교회에서 처음으로 사제서품식이 거행됐다. 당시 김대건?최양업 신부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강성삼·강도영·정규하 등 3명이 사제로 서품됐다.

성당을 건립하면서 본당은 본격적인 선교의 물살을 탔다. 1934년 본당 신자 수는 3780명으로 크게 늘어 본당은 ‘약현성당 증축기성회’를 조직, 사제관 이전부터 추진했다. 이후에도 수차례 성당 증축 문제가 거론됐으나 일제의 탄압과 6·25 한국전쟁, 분당 등으로 신자 수가 줄면서 증축은 시도하지 않아 현재까지 건립 초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1921년에는 좌석 수를 넓히기 위해, 남·여를 구분하기 위해 성당 안에 설치했던 칸막이는 없앴고, 넓은 벽돌기둥은 가볍고 얇은 돌기둥으로 대치했다. 1974년에는 대대적인 복원공사도 실시한 바 있다. 이후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하고 성당복원식을 가진 이듬해인 1977년, 약현성당은 사적 제252호로 지정된다. 1998년에는 한 취객의 방화로 성당 일부가 소실되는 안타까운 일을 겪기도 했지만, 한뜻으로 나선 신자들의 도움으로 새 모습을 찾고, 바닥은 설립 초기처럼 나무로 복원하기도 했다.

약현본당은 내적인 면에서도 한국 사회 역사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본당은 1895년 처음으로 본당 산하에 학교를 세웠으며, 이후 1901년 가명여학교를 정식으로 설립했다. 1906년에는 약명남학교도 설립해 지역 사회 교육의 구심점이 됐다. 특히 1937년 세운 본당 유치원은 유아교육의 선두주자로 관심을 모았다. 6·25 한국전쟁 이후에는 자선병원과 전쟁 중 남편을 잃은 부인들을 위한 양재소, 구호급식소 등을 운영하며 대사회적인 복지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아울러 한국교회에서 처음으로 남녀 혼성 합창단을 발족한 본당도 약현이었다. 본당은 1945년 남녀 혼성 합창단 활동을 지원, 전례 활성화에 큰 힘을 기울였다. 1986년에는 제15대 주임이었던 차인현 신부의 지원으로 종교음악연구소도 성당 내에 세워졌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교회음악대학원도 약현성당 터에 들어서 있다.

약현본당의 역사를 언급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순교사다. 성당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위치한 서소문 순교성지(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는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은 성인이 탄생한 순교지다. 새남터와 더불어 조선 시대 공식 처형장이었던 이곳에서는 103위 성인 중 44위와 현재 시복시성을 추진 중인 하느님의 종 27위가 순교했다. 본당 신자들은 1984년 서소문 공원 내에 순교자 현양탑이 지어진 이후 성지 관리에 자발적으로 나서 순교신심 고양에 힘을 기울여왔다. 본당은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지난 1991년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은 건립했으며, 2009년에는 피정의 집 등을 리모델링해 최신 전시 공간을 갖춘 새로운 전시관의 문을 열었다. 새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에서는 디지털 기기 등을 활용해 각종 교회사 자료와 유물 등을 보다 짜임새 있게 관람할 수 있다.

본당 주임 정훈 신부는 “신자들이 언제든 전시관과 성당 등을 찾아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느끼고 각자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며 “교회의 미래를 새로 열기 위해 믿음의 역사를 올바로 알고 이해하는 노력도 필수적”이라고 전했다.
 
 

 
▲ 1900년경 성당 전경.
종각의 첨탑이 건축되지 않은 최초의 성당 모습과 성당 주변의 논과 밭.
올라가는 오솔길 등 100년



가톨릭신문  2011-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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