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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 -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

여성 평신도 역할의 표양/ 젖먹이 죽음에 일순간 배교했지만, 자녀들 신앙 독려하며 의연히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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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
 

성인품에 아직 오르지 못했으면서도 평신도와 여성으로서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순교자가 이성례 마리아다. 현재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가운데 하나로 시복시성 대상에 포함돼 있다.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와 최경환 성인의 아내’. 이성례 마리아를 수식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의 행실은 당시 여성으로서 평신도 역할의 표양이 된다. 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이 마리아는 내포지역의 사도 이존창 집안의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성처럼 씩씩한 정신을 지녔다고 한다.

그는 집안일을 지혜롭게 꾸려나갔고 일가친척들이 불화 없이 지내는데 노력했으며,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나갔다. 남편을 따라 얼마 후 한양으로 이주했으며, 박해의 위험이 있자 강원도를 거쳐 경기도 부평, 수리산 뒤뜸이로 이주했다.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나고 난 뒤 어머니의 마음은 그리움으로 가득 찼고 잦은 이주로 인해 궁핍한 집안 사정에도 불구하고,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칭얼댈 때면 요셉과 성모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 가던 이야기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 산을 오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인내심을 갖도록 했다고 한다.

수리산에 정착한 이후로는 남편을 도와 교우촌을 일구는데 큰 힘을 쏟았다. 남편 최경환이 한양을 오가며 순교자의 시신을 묻어주고 교우들을 돌볼 때 이성례 마리아 또한 그 뒷바라지를 했으며, 포졸들이 수리산 교우촌에 들이닥치자 음식을 손수 준비해 대접한 다음 어린 자식들과 함께 한양으로 향했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그는 남편과 다른 자식들과도 격리돼 젖먹이 스테파노와 함께 여인들의 감옥에 수감됐고, 문초와 형벌을 받아 살이 찢어지는 갖은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가장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은 그의 젖이 나오지 않아 젖먹이가 굶어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때 잠시 흔들려 배교해 석방되기도 했지만,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돼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다시 체포된 이성례 마리아는 잘못을 뉘우치고 재판관 앞으로 나아가 그가 한 말을 취소하는 용기를 보였다고 한다.

그는 젖먹이 스테파노를 오히려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하며, 관례대로 사형선고를 받고 1840년 1월 31일 동료 신자 6명과 함께 당고개로 끌려가 참수됐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이성례 마리아는 순교하기 직전 자식들에게 ‘형장에 오지 말라’ ‘절대로 천주님과 성모 마리아님을 잊지 말아라’하고 당부했는데 그들로 인해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오혜민 기자 (oh0311@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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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1-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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