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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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메리놀 외방전교회 3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군종제도 창설에 기여, 세계대전·한국전쟁 난관에도, 한국교회 발전에 큰 공헌, 선교회 정신 확고히 알리며 한국외방선교회 설립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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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광진구 군자동에 위치한 메리놀외방전교회 한국지부 건물.
올해로 한국진출 88주년을 맞은 메리놀회 한국지부는 진출 100주년을 향한 새로운 발걸음을 모색하고 있다.
 

평안도 지역에서 복음 전파에 전력을 기울였던 메리놀 외방전교회(이하 메리놀회)는 1939년 10월 오세아 신부가 제3대 평양 지목구장으로 임명되고 이어서 1939년 7월 11일 평양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는 변화의 바람을 맞았으나 당시 전 세계를 휩쓸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화마를 피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오 신부는 대목구 승격으로 1939년 10월 29일 주교로 착좌, 선교에 박차를 가했으나 세계대전이 확대되면서 1942년 6월 1일 선교사 전원이 미국으로 강제 송환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메리놀회는 한국 진출 이후 이 시기까지 총 51명의 선교사를 파견했고 21개 본당을 설립했으며 방인사제 8명 및 수도자 39명을 배출하는 기록을 낳았다. 또 총 신자수가 2만6,424명에 달하는 등 교세 증가에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되고 한반도가 해방되면서 메리놀회 선교사들은 1947년 한국 선교를 위해 재입국하게 된다. 1947년 1월, 3명의 선교사가 새롭게 입국한 데 이어 2월과 4월 선교사들이 연이어 한국땅을 밟으면서 메리놀회 한국지부 활동은 새로운 도약의 단계를 맞게된다.

그러나 6·25 전쟁 등 역사의 상흔 속에서 회원들이 ‘죽음의 행진’에 동원되는 등 시련을 겪게 된다.

메리놀회는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전신인 한국천주교중앙위원회를 구성하고 군종제도 창설에 기여하는 등 한국교회 역사 안에서 기념이 될 만한 기록들을 남긴다.

한국천주교중앙위원회 구성은 초대 평양지목구장이었던 번 신부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해방과 함께 한국교회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게 되자 교황 비오 12세는 1947년 초대 평양지목구장이었던 번 신부를 초대 교황사절로 임명했으며 번 신부는 1949년 6월 주교로 임명됐다.

초대 한국 교황사절로서 전국적 차원의 교회사업 협의체 설립이 필요하다는 구상안을 내놓았던 번 주교는 이를 크레이그 신부에게 위임했고 1948년 11월 경 크레이그 신부는 한국 천주교중앙위원회를 구성,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이후 이 협의체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로 확대 개편됐다.

이와 함께 1950년 9월, 당시 미군부대와 포로 수용소에서 사목했던 평양대목구장 서리 캐롤(G.Carroll) 몬시뇰은 감리교 선교사 쇼우(W.Show) 박사 그리고 극동 사령부 군목과장 이반 엘 베넷(Ivan L.Bennett)과 함께 군종제도 창설을 제의, 한국교회는 1951년 2월 7일 군종제도의 성립을 보게 된다.

캐롤 몬시뇰은 가톨릭구제회(NCWC) 한국 지부장직 수행과 함께 1950년 나환자들의 구호 및 의료사업을 위한 성라자로마을 설립에 크게 기여했다.

메리놀회는 6·25 전후 1952년 충북지역의 사목을 맡게 되면서 보다 본격적인 선교 활동에 나서게 된다.

당시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는 메리놀회에 충북지역 사목을 위임하였고 이에 따라 전교회는 5명의 선교사들을 청주에 파견했다.

1958년 6월 23일 충청북도 감목대리구가 청주대목구로 독립, 단양군과 제천군을 제외한 충북 일원을 사목 구역으로 삼게 됐던 메리놀회는 같은 해 9월 파디(J.Pardy) 신부가 주교품에 오르면서 충북 지역에서의 활동 영역을 굳히게 된다.

또한 1962년 3월 25일 인천·부천시 및 강화·김포·옹진군 지역을 관할 구역으로 하는 인천교구가 설정되면서 맥노튼(나길모) 신부가 초대 인천대목구장으로 임명됐다.

이외에도 메리놀회는 서울·부산 지역에서도 여러 성당을 신설, 본당 사목에 앞장서면서 한국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힘을 보탰다.

이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시기를 맞으면서 메리놀회 역시 공의회의 쇄신과 개혁 정신에 따라 한국교회 안에서 ‘현실에 맞는 사목활동 지향’에 선교의 눈을 돌리게 된다.

특히 1980년대 접어들면서 선교사들은 본당 사목뿐 아니라 특수 사목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1981년에는 메리놀수녀회와 함께 경기도 성남에서 노동자 도시빈민 등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기초공동체 활동을 시작하는 등 소외 계층과 함께하는 활동에 참여폭을 넓히기 시작했다.

강남 고속버스터미널본당(1987), 가락시장본당(1991) 사목 등은 80년대 이후 본당 대형화로 빚어진 한국교회의 결점을 보완하는 사목 방안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메리놀회는 1974년 한국외방선교회 설립에 있어서도 선교회 정신의 주춧돌을 놓는 중요한 매개체가 됐다.

최근 메리놀회 100주년 감사미사를 통해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한국외방선교회 설립 당시 회칙 구성에 있어 메리놀회 회칙을 참고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런 면에서 한국외방선교회에는 메리놀외방선교회의 정신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현재 한국지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 수는 17명. 신학생 영성지도를 비롯, 나환자 지체장애인 등 사회복지 분야에서의 활동과 함께 이주노동자를 포함한 노동사목 민족화해 분야에서도 그 몫을 맡고 있다.

협조 사제 프로그램을 도입, 국내 교구 사제들에게 메리놀회 정신에 입각한 선교 사제로서의 활동을 독려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현재 2명의 교구 사제가 대만과 일본에 파견돼 활동 중이다.

지난 10월 25일 청주교구 내덕동본당에서 메리놀회 창립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했던 메리놀회 한국지부는 이제 앞으로 한국 진출 100주년을 향한 새로운 발걸음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지부장 함제도 신부는 “현재의 한국지부 화두는 ‘민족화해’라고 할 수 있다”면서 “한국지부가 첫 둥지를 틀었던 ‘침묵하는 교회’ 평양교구에 대한 생각을 잊은 적이 없는 만큼 민족화해 문제에 전력을 다하고 싶다”고 밝혔다.

함 신부는 “북한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조건 없이 도와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라고 말하고 “지금 당장 북한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대신 ‘새터민’들을 돕는 등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민족화해에 대한 관심을 지속해 갈 것이며 또한 빈부차이가 극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양극화로 인해 소외된 계층에 대해서도 한국교회와 함께 사목적 관심을 기울이고 싶다”고 밝혔다.
 
가톨릭신문  201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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