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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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감곡매괴성모순례지본당

성모신심 고양·지역 복음화에 매진/ 매괴동산·성모광장 등 성모순례지 조성/ 충북 첫 본당으로 성소못자리 역할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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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의 모습.

감곡 지역에 들어서면 산 뒤쪽을 제외하곤 어느 쪽에서나 성당 종탑이 보인다. 마치 하늘을 향해 기도의 손을 올리듯 뻗어 있다. 성당을 시작으로 산등성이를 휘휘 돌아가며 매괴동산과 묵주기도의 길, 성모광장, 산상 십자가의 길 등을 담은 성모순례지가 조성돼 있다. 이곳에 서면 아래 감곡 지역 전체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이다.

길은 잘 다듬어져 그리 힘들지 않게 성당에 다다를 수 있다. 눈에 익은 듯 다시 보면 또한 낯선 듯 위풍을 자랑하는 붉은 벽돌 성당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다. 성당 옆에는 성모순례기도 등에 이동식으로 활용되는 미니어처 성당이 실제와 똑같은 형태를 자랑하며 서 있다. ‘성모님께 드리는 편지함’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순례는 이곳 성당 앞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다. 이번 호에서는 깊은 성모신심의 샘이 여전히 솟아나고 있는 청주교구 감곡본당(주임 반영억 신부)과 매괴 성모 성지를 둘러본다. ‘매괴’는 라틴어 로사리우스에서 유래된 한자식 표현으로 장미화관, 묵주 등을 일컫는다. 
 

 
▲ 2009년 성모순례기도.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는 지난 2006년 이곳을 ‘매괴 성모 순례지’로 공식 선포했다. 한국교회에서는 두 번째로 성모성지가 탄생한 것이다. 또한 성당은 이탈리아 로마 리베리오 성모 대성전과 특별한 영적 유대로 결합된 성당 및 순례지로도 지정됐다. 이에 따라 성당·성지를 순례하고 정해진 기도를 봉헌하면 전대사의 특전이 주어진다. 아울러 본당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순례객들을 위해 목요피정을 비롯해 매 주일과 수·목·금·토(매월 첫 토요일은 제외)요일에 순례미사를 봉헌한다. 또한 성당·성지 박물관에서는 각종 전례도구와 서적 등의 교회 유물 100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감곡본당(매괴 성모 순례지) 초대 주임 임 가밀로 신부(R. Camillus Bouillon, 1969~1947, 파리외방전교회)가 평소에 가장 자주 하던 말이다. 임 신부는 감곡본당 사제로 51년간 사목 활동을 펼쳤다. 이 때문에 본당의 역사와 그의 삶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임 신부는 프랑스 루르드성지에서 20km 떨어진 마을에서 태어나, 자신을 성모에게 봉헌한 신심 깊은 이였다. 사제품을 받은 이듬해 그의 성모신심은 머나먼 아시아, 그 안에서도 척박하다고만 알려진 한국교회에 와 닿았다.

감곡 지역을 구심점으로 성모신심이 본격적으로 번지게 된 때는 본당이 설립된 18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 가밀로 신부는 사제서품을 받자마자 1894년 예수성심신학교가 처음 세워진 부엉골본당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임 신부는 사목 방문차 장호원 지역을 지나다 마치 대궐처럼 웅장한 집을 보고, 곧바로 ‘그야말로 성당으로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그는 끊임없이 성모 마리아께 본당 설립을 청했다고 한다.

임 신부가 우연히 보고 새 성당 부지로 점찍었던 대궐 같은 한옥은 명성황후 육촌 오빠 민응식의 집이었다. 한마디로 임 신부가 구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집이었다. 하지만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일본군이 마을을 습격, 초토화시킴으로써 마을 전체가 폐허가 됐고, 임 신부는 민응식의 집과 산, 대지 등을 싼값에 구입해 성당 건립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성당을 봉헌한 이후 임 신부는 특히 조선인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충북 지역 최초의 본당답게 많은 본당들을 분가시켰다. 본당은 성소못자리로서도 눈부신 역량을 보여, 지금까지 150여 명의 성직·수도자를 배출했다.

오랜 역사 안에서 본당은 부지 구입 때부터 이른바 역사 속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큰 기적같은 일들과 종종 마주해왔다.

무엇보다 성당 중앙 제대 위에 안치된 ‘매괴 성모상’은 수많은 순례객들을 기도로 이끄는 힘이 되고 있다. 이 성모상은 프랑스 루르드에서 제작, 대성당 건립과 함께 제대 중앙에 안치됐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들이닥친 인민군에 의해 총격을 받는 사건이 발발했다.

당시 인민군들은 성당을 지역 사령부로 쓰기 위해 성모상을 부수려했다. 하지만 성모상은 총알을 7발이나 맞았지만 전혀 부서지지 않았고, 인민군들이 강제로 끌어내리려 하자 성모상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더 이상은 성모상에 손댈 수 없었던 인민군들은 곧바로 철수했다. 당시 성모상을 꿰뚫었던 총알 흔적은 여전히 뚜렷이 남아있다.

성모광장은 이에 앞선 1943년 조성됐다. 성모광장 또한 기적적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일본인들은 이 터에 신사를 지으려 나섰다. 그러자 임 신부는 그 터에 무염시태 기적의 패를 묻어두고 “이 공사를 중단하게 해주시면 이곳을 성모님께 봉헌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이후 뜻밖의 여러 가지 기상이변이 지속되면서 일본인들은 공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신자들은 이후 신사 터가 될 뻔했던 곳을 1955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을 기념해 성모광장으로 봉헌했다. 이렇게 어렵사리 봉헌된 성모광장은 한국교회 안에서 처음으로 성체거동이 거행된 곳으로도 의미가 크다. 이후 본당과 교구는 전쟁 시기만을 제외하고 해마다 이곳에서 성체현양대회를 거



가톨릭신문  2012-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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