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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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광주대교구 산정동본당

“전라남도의 복음화, 첫 발을 내딛다”/ 1953년 한국교회 최초로 레지오마리애 회합 열려/ 교구, 전남 선교 역사 기억하며 일대 성역화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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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쪽을 향해 서 있는 예수성심상.
 

 
전라남도 목포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정2동 산마루. 아래쪽에서 바라보면 대형 예수성심상이 두 팔을 펼치고 환영하는 모습과 가장 먼저 마주한다. 동쪽을 향해 우뚝 서 있는 이 예수성심상 뒤로 성당과 ‘한국 레지오마리애 기념관’ 및 ‘목포 선교 100주년 역사관’이 자리한다. 110여 년의 시간을 훌쩍 넘기면서도 지역 복음화의 못자리로 든든히 자리매김하고 있는 본당 역사의 발자취를 이곳에서 생생히 만나볼 수 있다.

산정동본당(주임 장민휘 신부)은 광주대교구 내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본당이다. 또 한국에서 처음으로 레지오마리애 활동이 시작된 의미 깊은 순례지다. 이때문에 레지오마리애 단원이라면 한 번쯤 꼭 순례하는 곳이기도 하다. 도심활동 및 인구의 이동과 분당 등으로 현재는 주일미사 참례자 수 300여 명 남짓의 작은 본당공동체 형태지만, 신앙 열의만큼은 그 어느 공동체보다 깊다. 특히 본당은 기념관 내에 단체 순례객들을 위한 식사와 숙박시설을 갖추고 순례와 각종 피정, 교육 및 연수 등을 지원하고 있다. 숙박시설은 하루 80명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다. 또한 본당은 순례객들이 미리 요청할 경우 목포 지역 역사문화 전문 해설사도 초빙, 지역 탐방 프로그램도 겸할 수 있도록 돕는 등 순례객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

한국교회 첫 쁘레시디움이 회합할 때 사용했던 소형 벡실리움(Vexillum)과 세계 최초의 레지오 교본을 비롯해 레지오마리애 관련 사료들과 교회유물들로 가득 찬 이곳은 비단 레지오마리애 단원이 아니더라도 신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러볼만한 신앙의 터전이다. KTX 고속열차 목포역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위치, 전국 어디에서나 큰 불편 없이 돌아볼 수 있다.



1953년 5월 31일 산정동성당에서는 레지오마리애 회합이 진행됐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레지오마리애가 빛을 본 시간이었다. 이후 레지오마리애는 급속도로 확산, 5년 만에 전국 단위의 국가평의회를 운영하기에 이른다.

오랜 일제침략기의 그늘에서 미처 회복되기도 전, 6·25한국전쟁은 목포도 비켜가지 않았다. 목포본당(현 산정동본당)은 외국수도회와 국제구호단체 등의 도움에 힘입어 피폐해진 삶터를 정비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에 앞장섰다. 하지만 육체만이 아닌 영혼을 돌보는 영성적 활동은 크게 부족한 상황이었다. 당시 광주교구장이었던 헤롤드 현 주교는 이에 대해 지속적으로 성찰해오다 레지오마리애 도입을 추진했다. 목포 작은 본당에서 시작된 이 신심운동은 이후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평신도사도직 활동으로 자리매김했다.

본당이 설립된 1897년, 목포 지역에는 신자가 한 명도 없었다. 마을도 100가구 정도로 구성된 소규모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선교 근거지 마련을 위해 목포 지역 본당 설립에 박차를 가했었다. 일제가 각종 물류 수송 등을 위해 제물포와 원산 부산에 이어 1898년 목포를 개항할 예정이었던 터라 입지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본당 초대 주임인 드예(A.Des hayes,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는 우선 전북 순창군 아천리공소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이듬해 목포로 진출한 드예 신부는 1899년 목포항이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에, 진흙과 모래를 반죽해 구운 연와(煉瓦)로 만든 아담한 양옥집 성당을 세웠다. 아천리공소 신자들이 목포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본당 기반도 다졌다. 전남 교회의 모교회로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후 본당은 전라남도 모든 지역을 관할, 복음화에 힘썼다. 아울러 본당 신부들은 각 섬지역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활발한 사목방문을 이어갔다.

본격적인 본당 사목에 돌입한 이후, 본당은 1926년에는 성심소학교도 설립했지만, 이 학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독립운동 스파이를 양성했다는 죄목으로 문을 닫았다.

1931년에는 보다 효율적인 선교활동을 위해 전라남북도 지역이 각각 감목대리구로 설정됐다. 한국인 사제와 전교회장 등이 크게 부족했던 전라남도 지역의 선교활동은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소임으로 맡겨졌다. 당시 골롬반회도 한국본부를 목포에 두고 활발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또한 성당은 1937년 광주지목구가 설정되자 임시 교구청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일제 치하에서도 신앙의 불은 더욱 뜨겁게 타올라, 본당 내 각종 평신도 활동과 신심단체 활동도 눈에 띄게 성장했다. 1940년대 초에는 새 건물을 확충, 교리실과 가톨릭문고도 설치했다. 한국전쟁으로 잠시 사목활동이 중단되긴 했지만, 국군과 연합군이 목포를 수복하자마자 1951년 경동본당도 분가시킨 바 있다.

본당 설립 초기 지었던 양옥집 성당은 1913년 새 성당으로 변모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현재는 1966년에 지어진 성당에서 각종 전례가 봉헌되고 있다.

하지만 옛 성당 터에는 조만간 ‘성미카엘대성당’이 세워질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광주대교구는 전남 선교활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본당 일대를 가톨릭 성역화하는 노력의 하나로 기념성당 건립을 추진, 지난해 기공식을 마련한 바 있다.
 

 
▲ 목포선교100주년·



가톨릭신문  2012-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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