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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 - 순교자 허인백 야고보

겸손·인내의 덕 쌓으며 가난하고 병든 이 도와/ 24세 입교, 열심한 신앙생활로 존경 받고/ 혹독한 박해 중에도 배교 않고 신앙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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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자 허인백 야고보
 

하느님의 종 124위에 오른 허인백(야고보) 순교자는 1822년 경상도 김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언양으로 이주해 살던 인물이다. 24세 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한 그는 입교 이후에 아주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며 교우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가장으로서 아내 박조이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으며, 정결을 지키기 위해 아내와 남매처럼 살았다. 극기를 실천하며 겸손과 인내의 덕을 쌓는데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는 애긍에 힘써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허인백은 포졸들에게 체포돼 무수히 많은 매를 맞고 언양으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이 고백했다. 옥에 갇혀 50일을 지낸 뒤 경주로 이송된 그는 이곳에서도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으며, 8개월을 옥에 갇혀 지냈다.

박해를 중단하라는 임금의 명이 중간에 떨어지자 다시 돌아오게 된 허인백은 울산의 죽령(현 경남 울산시 상북면 이천리)의 산중으로 이주해 하느님의 종 명단에 함께 포함된 이양등(베드로), 김종륜(루카) 등을 만나 함께 신앙생활을 했다.

이곳에서 이들은 나무그릇을 만들어 팔며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묵상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자주 순교원의를 드러내곤 했다고 전해진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지만 죽령 교우촌은 비교적 안전해 발각되지 않았으며 2년 후인 1868년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됐다. 허인백은 동료들과 함께 체포돼 다시 경주로 끌려갔으며 가족들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주어라. 성녀 바르바라의 순교행적을 기억하도록 하거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쏟아지는 문초에도 천주교 서적이 있는 곳을 대거나 다른 신자를 밀고하지 않았으며, 그의 신앙 또한 변하지 않았다. 울산으로 이송된 그는 이곳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군대지휘소가 있던 장대(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로 끌려가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가 1868년 9월 14일로 당시 그의 나이 46세였다.


오혜민 기자 (oh0311@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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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1-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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