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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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대전교구 공주 중동본당

“무자비한 총질에도 목숨 걸고 성당을 지키다”/ 내포지방과 연결된 공주 지역 … 호남으로의 신앙통로/ 1800년대 후반 파리외방전교회 통해 본격적인 말씀선포/ 본당 설립 100주년 전·후로 나눔운동과 복음화에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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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의 발발. 당시 인민군들은 공주 중동성당과 사제관 건물을 몰수, 정치보위부 사무실 및 인민재판소 등으로 사용했다. 게다가 군화발로 성당에 난입해 성모상과 감실, 제대 등에 마구잡이로 총격을 가했다. 제의와 성물 등도 서슴없이 훼손했다. 이에 분개한 최종수(요한·본당 제5대 주임 최종철 신부의 동생)는 인민군에 항의했다. 수십 명의 인민군들에 의해 성당 마당으로 끌려나온 최종수는 그 자리에서 총살당한다. 권오헌(베드로) 본당 총회장은 부서진 감실과 성작 등을 수습하고 흩어져버린 성체를 모두 모아 영했다.

목숨을 걸고 성당을 지킨 신자들의 모범적인 희생, 이 덕분에 성당은 더 이상 파손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하늘을 향해 시원스레 쭉 뻗은 종탑.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냈다는 고딕양식의 열매 중 하나다. 붉은색과 회색 벽돌로 지어올린 성당은 상당히 눈에 익은 모습이다. 설핏 봐도 서울 중림동약현성당과 매우 닮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약현성당을 본따 지은 성당이라고 한다.

공주 중동성당은 공주 옛 시가지 중심부 언덕에 자리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주변 모습은 계속 변화해왔지만, 성당보다 높게 자리한 건물은 주변에선 찾아볼 수 없다. 덕분에 성당 정문에 서면 시가지가 한눈에 펼쳐진다. 서북쪽 방향으로는 황새바위성지에 시선이 가닿기도 한다. 국고개 문화의 거리를 가운데 두고 성당 맞은편에는 충남역사박물관도 자리하고 있어, 가족 문화나들이를 겸해 성당을 순례해도 좋을 듯하다. 단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성당에 들어서기 전, 마당에서는 성모상과 최종철 신부의 묘, 최종수의 순교비와 먼저 마주할 수 있다.


 
▲ 공주 중동본당은 1897년 합덕본당과 공세리본당에서 공동 분리되어 설립됐다.
 
 
내포지방과 연결되는 공주지방은 호남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통로였다. 이때문에 이곳은 선교사들이 오가는 길목이자, 선교의 주요 거점이 됐다.

공주지방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때는 170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교회 최초의 세례자인 이승훈에게서 전해진 복음말씀은 권일신에 의해 다시 예산 출신의 이존창에게 전파됐다. ‘내포의 사도’라 불리던 이존창은 공주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신유박해와 맞닥뜨려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한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신앙공동체가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훨씬 훗날의 일이다.

1800년대 후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충청도 지역에서도 부지런히 말씀을 선포했다. 그중 충남 지역 사목은 두세(C-E. Ducet) 신부가 전담했다. 두세 신부는 충남 천안과 공주 부여 등을 비롯해 경기도 안성, 평택까지 넓은 지역의 사목방문을 꾸준히 이어갔다. 그가 설정한 공소만도 35개나 된다. 두세 신부는 공주 읍내에도 진출, 공주공소를 설립한다. 당시만 해도 공주 읍내 신자 수는 20여 명에 불과했다.

이후 1897년, 합덕본당과 공세리본당에서 공동 분리된 ‘공주본당’(현 공주 중동본당(주임 서용태 신부)의 전신)이 설립됐다. 하지만 본당은 아직 사제가 머무르거나 전례를 거행할 만한 성당은 갖추지 못했다. 이에 따라 초대 주임인 기낭 신부(P.Guinand)는 본당 설립 초기엔 공세리본당의 공소였던 요골공소에서 임시 거처하며 공주 읍내 중심지인 국고개 언덕 위에 성당 터를 마련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처음 선보인 성당은 기와집과 초가집을 개조해 꾸며졌다.

본당의 초기 전교활동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우선 지역민들은 가난에 찌들대로 찌들어 교리를 배울 생각조차 하려들지 않았다. 지방관리들과 유림들의 방해로 미신으로 몰려 선교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개신교 목사들의 방해였다. 이후에도 일제강점기가 이어지면서 전교 활동은 더욱 침체기를 걷는다. 옹기촌의 경우 땔감이 없어 떠나는 신자들도 왕왕 늘었다.

하지만 본당은 각종 난관도 꿋꿋이 헤쳐 나가며 지역 사회 복음화의 요람으로 한 길을 걸어왔다. 특히 5대 주임인 최종철 신부와 당시 신자들은 본당의 기틀을 탄탄히 다졌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본당은 110여년의 역사를 훌쩍 넘어서 지역 사회 신앙의 구심점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공주 중동본당 전경.
 
 
우선 최 신부는 약현성당의 모습대로 직접 설계에 나서 현재의 성당을 건립했다. 이 성당은 일제강점기, 전통적인 목조건물에서 현대 건축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지어져 건축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정면 중앙에 종탑을 갖춘 성당은 외관상 라틴 십자 형태를 보인다.

또 출입구와 창은 아치로 장식해 시원하게 위로 뻗어 있다. 공주 지역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이 성당과 사제관은 현재 충청남도 기념물 제14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아울러 본당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엔 근화유치원을 설립해 지역 사회 유아교육의 요람으로서도 큰 역할을 해왔다. 이 유치원은 가톨릭에 반감을 가지고 있거나 관심이 없는 지역민들과 교류하는 차원에서도 큰 의미를 지녔다.

1982년, 본당은 공주 교동본당을 분가시키면서 이름은 ‘공주 중동본당’으로 바꿨다. 특히 본당은 설립 100주년을 전후해 지역 사회 나눔 운동의 구심점으로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복음화에 힘써오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1-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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