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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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로 본 가톨릭신문 85년 (1)

민족과 교회 고난·영광의 역사 함께해온 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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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세기, 근·현대 1백년은 유례없는 격동기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복음의 씨앗이 열매를 맺기 전에 만난 고난과 박해의 터널을 지나 1886년 한불수호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교회는 가까스로 얻은 선교의 자유를 바탕으로 19세기말과 20세기 초를 거치며 꾸준한 발전을 거듭하다가 다시금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땅, 그 혹독한 탄압 속에서 민족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마침내 광복, 하지만 우리 민족은 수십 년의 억압을 헤치고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또 다른 비극의 운명에 처하고 만다. 열강의 침략적 속성을 여실히 드러냈던 전후 민족 분단의 과정은 기어이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적인 결말을 빚어냈고, 그 분단의 상처는 폐허였던 조국이 경제적 성장을 이룬 오늘날에까지도 깊은 상흔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허리가 잘린 조국에서 교회는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독재 정권에 대항해서 투쟁에 나서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사회는 정치적 민주화를 이뤄냈다.

그 와중에도 한국교회는 끊임없는 성장과 발전을 거듭해 세계교회 안에 명실상부한 보편교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았다. 우선 폭발적인 신자 증가율은 1930년 불과 10만 명에 불과했던 교세는 1974년말 100만 명을 돌파했고, 1985년말 200만 명, 1992년말 300만 명, 그리고 대희년인 2000년말에는 400만 명을 넘어섰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과 함께 103위 순교자가 성인으로 탄생했으며 서울 세계성체대회를 통해 세계 각국 교회로부터 주목받았다. 전후 원조를 통해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던 한국 천주교회는 국가 경제의 성장, 늘어난 신자 수에 힘입어 받는 교회로부터 나누는 교회로 성장했고 이제는 전세계로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다.

제삼천년기에 접어들어 한국교회는 성장통에 시달리며 또 다른 쇄신의 요청을 받고 있다. 상대적으로 신앙적 활력을 간직하고, 중국을 포함하는 동북아시아의 복음화에 있어서 교두보로서의 역할이 기대되지만, 90년대 이후 교회는 정체된 복음화율, 날로 심각해지는 성사생활의 침체, 교회 중산층화와 신앙의 사사화,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의 위협 등으로 ‘새로운 복음화’의 노력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일단의 평신도 청년들에 의해, 1927년 월간 「천주교회보」에서 시작된 가톨릭신문은 「가톨릭신보(新報)」, 「가톨릭시보(時報)」 그리고 다시 「가톨릭신문」으로 불리우며 민족과 교회와 영욕(榮辱)을 함께해왔다. 올해 창간 85주년의 역사적인 순간을 맞은 가톨릭신문은 한국 근현대 교회사의 산 증인으로서, 한국 근현대 100년을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숨쉬어왔다. 지면 구석구석마다 민족과 국가와 함께해온 교회의 모습들, 세상과 교회 안에 머물며 우리의 고통과 환희를 함께 겪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 그리고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언론 사도직을 충실하게 수행해온 가톨릭신문의 피와 땀이 어려 있다.

창간 후 85년 동안 민족과 교회, 그 고난과 영광의 역사를 함께해온 가톨릭신문의 지면을 통해 오늘날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심오한 섭리를 통해 우리 민족을 어떻게 이끌어 오셨는지를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지난 85년 한국교회와 사회의 역사를 가톨릭신문 지면의 주요한 기사들을 통해 살펴본다.



「천주교회보」의 창간과 일제시대 한국교회

“本報(본보)는 左(좌)의 세가지 要求(요구)에 應(응)하야 出生(출생)하였으니 一(일)은 南方敎區(남방교구)내의 消息報道(소식보도)요 二(이)는 敎會發展(교회발전)에 대한 意見交換(의견교환)이요 三(삼)은 步調一致(보조일치) 이것이외다”(天主敎會報(천주교회보) 1927년 4월 1일자 창간호에 실린 창간사 중에서)

1927년 4월 1일, 남방교구(대구대목구) 일단의 청년들이 월간지로 발행한 ‘천주교회보’는 문맹률 80에 미약하던 당시 교세를 감안하면 일대 ‘사건’이었다. 아쉽게도 현재 창간호가 남아있지는 않지만, 창간호에 발행자들의 의지를 담아 명시한 위 ‘창간사’는 오늘날까지 가톨릭신문의 사시(社是)로서 그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다. ‘천주교회보’는 그 후 53년 ‘가톨릭신보(新報)’, 54년 ‘가톨릭시보(時報)’, 80년 ‘가톨릭신문’으로 제호가 변경됐다.

이 시기 가톨릭신문(천주교회보)의 보도는 주로 창간을 주도한 계층이자 주된 독자층인 남방교구 청년회의 소식을 전하는데 할애됐고, 계몽 및 신자교육 목적의 보도가 주류를 이루었다. 예를 들어 천주교회보 제2호에 실린 ‘敎友學生諸君(교우학생제군)에게 告(고)함’이란 글에서 조선교회를 발전시킬 책임이 학생들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학생들이 지닐 올바른 신앙태도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또 ‘科學(과학)과 宗敎(종교)’(5호), ‘宗敎(종교)의 寬大(관대)에 청하여’(8호), ‘오 주 예수 탄생하신 날’(9호), ‘가톨릭 敎會觀(교회관)’(11호) 등을 실어 독자들의 교양에 도움을 주고 ‘祈禱文(기도문)에 대하여’(6호), ‘朝鮮致命福者(조선치명복자) 瞻禮日(첨례일)을 當(당)하여’(7호), ‘新年(신년)을 맞이하는 나도’(10호)라는 글에서는 신자들의 영성생활에 도움과 가르침을 주고 있다.

천주교회보의 폐간에 즈음한 시기에 보도된 몇몇 기사들은 일제하의 개화바람을 타고 급증한 불량 출판물과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사상조류에 휩쓸리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56호(1931년 11월 1일자)에 보도된 ‘가톨릭운동 철저한 실행이 있기를 바람’, 64호(1932년 7월 1일자) ‘假先知者(가선지자)들을 조심하라’, 72호(1933년 2월 1일자) ‘고난에 대한 吾人(오인)의 태도’ 등이 대표적인 글이다.

그러나 1933년 4월 폐간 때까지 천주교회보는 교회 안의 소식보도와 신자교육 및 영성생활에 관한 내용들뿐,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가 없다. 단 두 번 예외는 있다. 창간 3년 후인 1930년 5월호에 실린 ‘레오 13세 교황의 사회관’이란 글과 1931년 3월호의 ‘사유재산문제’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외에는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보도나 논설을 찾아볼 수 없다. 당시 민족 해방운동에 교회는 거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이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신학교 안에서의 만세사건도 회보에 보도되지 않았다.


 
▲ 천주교회보 창간호.
 
 
분단시대의 개막과 한국교회(1945~1962)

회보는 주교단의 결정에 의해 1933년 4월 1일자(제73호, 창간 6주년 기념호)를 끝으로 폐간됐다가 1949년 4월1일 복간된다.



가톨릭신문  2012-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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