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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살 청년 평화에 바란다] 교회와 사회에 감동을 주는 신문

오용석(프란치스코 사베리오, 한국 평협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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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신문이 태어난 1988년은 격동의 한 해였다. 한국교회에서는 제44차 서울세계성체대회를 1년 앞둔 해였고, 그해 말에는 보편교회의 역사적 문헌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발표됐다. 남북한 간 해빙무드를 조성한 7ㆍ7선언도 같은 해 일이었다. 이 선언이 있고 나서 정의구현사제단은 문규현 신부를 평양에 보내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숨 가쁜 역사적인 해에 평화신문은 `진리를 빛으로`, `정의를 목표로`, `사랑을 원동력으로`, `참 언론을 펴 나아가려는 것`을 사명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모든 인간 형제의 귀가 되고 입이 되며, 나아가 겨레와 인류의 평화를 위해 큰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이 시대와 분단된 남북의 7천만 겨레 앞에 다짐`하며 세상에 나왔던 것이다. 이렇듯 평화신문 탄생의 명분은 시기적으로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고, 더욱이 국민에게 큰 존경을 받던 김수환 추기경이 발행인이었기에 교회 안팎으로 평화신문에 대한 기대는 참으로 컸다. 이런 평화신문이지만, 교회의 유일한 신문이 아닌데다가 주간지라는 한계성과 인적ㆍ물적 부족함으로 인해 인고(忍苦)의 24년을 지내왔다.

 그동안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려 한 노력만으로도 평화신문 24년은 24K 순금 가치 같은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빛이신 주님의 진리를 알리기 위해 성서신학에 조예가 깊은 사제들의 글 연재로 독자들이 `성경의 궁금증`을 풀고 `생활 속의 복음`을 접할 수 있게 했다. 평화방송 TV와 함께한 `기획강좌 신앙의 재발견`은 읽는 이들에게 자신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보고 바른 신앙의 길을 찾게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해설은 독자들로 하여금 현대사회에 적응하고자 하는 보편교회 모습을 제대로 이해하게 하는 연재물이다. 하느님 창조질서와 사회정의에 관한 교회 가르침인 생명과 사회교리 연재는 영성교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현세의 생명과 환경, 사회교리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는 데 기여하고, 상담코너 `아 어쩌나?`는 평화신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기 꼭지로 자리 잡고 있다.

 세상 안에서 소리 없이 살아가는 신앙들의 모습을 전해주는 `아름다운 동행`은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우리의 메마른 가슴에 사랑의 불을 지피는 역할을 해왔다. 또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는 특정한 날의 반짝 행사가 아니라 독자들이 늘 어려운 이웃을 만나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 수 있게 하고 있다. 사랑을 원동력으로 하겠다는 평화신문 창간 이념을 독자와 함께 실현하는 본보기라 할만하다.

 병원이나 사회단체들이 봉사활동에 뜻을 모아 함께하는 `행복한 동행`의 현장 취재 기사라든지, `사랑의 학교 만들기` 같은 특별기획은 우리 사회 어두운 면을 충분히 밝고 아름답게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읽게 해준다. 이 밖에 평화신문 신춘문예는 거의 불모 상태였던 한국 가톨릭문예 창작 발표의 장을 마련한 것으로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평화신문 24년의 공로 이면에는 아쉬움 또한 없지 않다. 무엇보다 독자들이 다른 어떤 신문보다 먼저 집어 읽고 싶은 신문이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평화신문이 다른 신문들과의 차별성이 뚜렷하지 않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김수환 추기경 선종 때의 국민적 감동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이 포함된다.

 또 평화신문은 주간지 특성을 살려 독자들이 배달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게 만들지도 못했다. 그것은 기사 내용이 사회적 관심과 동떨어져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컨대, 최근 한미FTA나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교구 간, 신자 간 첨예한 입장 차이로 갈등이 증폭되는 상황을 평화신문은 몇 줄의 소극적 사실보도에 그침으로써 교회 정론지로서의 역할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적어도 신자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올바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사회교리 해설이나 사회교리 실천 현장의 사례들을 발굴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했어야 했다.

 그리고 독자들 욕구를 읽는 데도 부족함이 있어 보인다. 거의 고정되다시피 한 필진이 그 예다. 신자 독자들은 본당이나 교구에서 직접 만나기 어려운 저명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을 지면을 통해 만나고 싶어한다. 이런 수요를 못 채워준 평화신문에 대해 독자들은 교구 주보와 큰 차별이 없다고 말한다.

 바라건대, 하루의 끝과 시작의 만남이 24시이듯 평화신문 창간 24주년이 더 큰 발전을 위한 새로운 시작이 됐으면 한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깊은 성찰을 통해 잘했던 것은 더욱 잘하고 미흡했던 부분은 끊임없이 보완해 나간다면 교회와 사회에 진정한 감동을 주는 신문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평화신문 24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교회와 사회의 등불로 발전해 나가기를 기도한다.


 
▲ 평화방송ㆍ평화신문은 1988년 5월 15일 창립 이래 지금까지 24년간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앞장서왔다.
사진은 서울 중구 삼일대로에 있는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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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2-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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