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덕원의 순교자들]<18>힐라리우스 (베네딕토) 호이스 수사

39년간 목공, 간호 등 다방면에서 헌신한 ''만물박사''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힐라리우스 (베네딕토) 호이스 수사 (Hilarius hoiß)



▲ 그림=김형주(이멜다)

 ▲출생: 1888년 6월 27일, 독일 운터라우(Unterau)
 ▲세례명: 베네딕토
 ▲한국명: 허희락(許喜樂)
 ▲첫서원: 1910년 8월 15일
 ▲한국파견: 1911년 1월 7일
 ▲종신서원: 1913년 11월 1일
 ▲소임: 숭공학교 교사, 수도원 건축 담당
 ▲체포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
 ▲선종일자 및 장소: 1950년 12월 12일, 만포 관문리 수용소



 
▲ 숭공학교 교사로 한국에 파견된 힐라리우스 호이스 수사가 학생들과 함께 제작한 수레를 둘러보고 있다.
 


 
▲ 대령동성당 전경.
힐라리우스 호이스 수사가 지은 이 한국인 성당은 마적에 의해 1935년 전소됐다.
 


 
▲ 약초를 이용한 자연요법 치료에 뛰어났던 오이스 수사가 한국인 환자들을 간호하고 있다.
 

`수도원의 만물박사` 힐라리우스 호이스 수사. 목공ㆍ철공ㆍ도장ㆍ요리ㆍ약초재배ㆍ제약ㆍ간호 기술에 뛰어난 그는 성 베네딕도회 서울ㆍ덕원ㆍ연길ㆍ일본 도노가오카 수도원의 건축기사,주방장, 의사 노릇을 도맡아 한 살림꾼이다.

 호이스는 1888년 6월 27일 독일 뮌헨 프라이징 교구 코헬제의 작은 마을 운터라우에서 아버지 안드레아스 호이스와 어머니 마리아 보오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베네딕토.

 아버지 안드레아스는 날품팔이였고, 어머니 마리아는 그가 네 살 되던 해에 뇌막염으로 숨져 호이스는 외삼촌 집에서 자랐다.

 호이스는 초등학교 졸업 후 운터파이센부르그에서 마차 수리 기술(제차도제)을 배웠다. 이곳 본당 신부는 그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할 때 기꺼이 추천서를 써줬다. 본당 신부는 추천서에 "호이스는 규정에 따라 축일과 의무축일에 자주 성체를 영했으며, 기쁜 마음으로 정비공장에서 일했고, 필요할 때에는 농사일도 했다. 그의 품행은 모범적이고 윤리적이며 종교적이다"라고 적었다.

 1907년 10월 12일 입회한 그는 `힐라리우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했다. 1910년 8월 15일 첫서원을 한 그는 1911년 1월 7일 서울 백동수도원으로 파견돼 기술학교인 `숭공학교`에서 목공과 마차 수리 기술을 가르쳤다. 서울 백동수도원에서 화급히 필요한 사람이었던 호이스 수사는 한국 도착 즉시 작업장을 만들어 한 유럽인이 부탁한 헌 마차를 완전히 새것처럼 수리해 첫 주문을 지체없이 완수했다. 그는 1913년 11월 1일 서울 백동수도원에서 종신서원했다.

 그의 활동에 관해 1915년 상트 오틸리엔 「선교잡지」는 "현재 한국 민중의 빈곤을 고려하건대, 이 실업학교가 당분간은 이 민중을 사회적으로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수사들은 실제 작업을 지도할 뿐 아니라 몸소 열심히 함께 일한다. 이를 통해 육체노동이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높인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소개했다.

 힐라리우스 호이스 수사는 숭공학교에서 기술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아픈 학생들을 기꺼이 돌보는 등 사랑으로 대했다. 1920년 초 서울에 유행성 독감이 크게 번져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보니파시우스 사우어 아빠스는 이 사실을 보고하면서 "이 전염병으로 하루에 200명씩이나 사망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많이 희생됐다. 만일 우리가, 특히 힐라리우스 호이스 수사가 돕지 않았다면 사망



가톨릭평화신문  2013-10-27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28

시편 32장 10절
악인에게는 고통이 많으나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자애가 에워싸리라.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