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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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가쿠레키리스탄의 발자취] 숨어서 피운 신앙의 꽃 (상)

은둔 생활로 신앙 지켜온 ‘숨은 그리스도인’, 십자가는 불상, 성모자상은 탱화로 위장, 박해 피해 불교도로 가장한 “슬픈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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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순교’ 역사를 상징하는카미로 콘스탄츠오 신부 순교비.
카미로 신부의 화형장면을 묘사한 기념탑이다. 야이자 사적공원에 세워져 있다.
 

만약 259년간 ‘이야기’로만 전해져온 신이 있다면 믿겠는가. 그 신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이며, 그 중 성자는 말씀으로 잉태됐으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었으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그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리라 말한다면 믿겠는가.

이 ‘이야기’를 믿고 지킨 이들이 있다. 바로 일본의 가쿠레키리스탄(숨은 그리스도인)들이다. ‘가쿠레’는 일본어로 ‘숨다’, ‘키리스탄’은 포르투갈어로 ‘그리스도인’을 뜻한다.

일본 가톨릭신앙의 역사는 ‘순교’의 길을 택했던 순교자들과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희망하며 겉으로는 ‘배교’의 길을 택해야만 했던 가쿠레키리스탄의 삶 위에 쓰였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피만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십자가를 밟아야 했던 가쿠레키리스탄들의 그늘진 삶 또한 값지다.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금교령이 내려진 이후 1873년 신앙의 자유를 찾기까지 259년간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은 비밀공동체를 만들어 신앙을 지켰다. 이들의 오랜 잠복신앙은 그대로 일본의 가톨릭 역사가 됐고, 그 역사의 현장은 일본 정부의 지정 문화재와 현 지정 문화재, 국보 등으로 보존되고 있다. 나가사키 순교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나가사키 순례센터 초청으로 죽음과 은둔으로 신앙을 지켜낸 가쿠레키리스탄의 발자취를 따라가봤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1시간 30분,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해 다시 자동차로 2시간 남짓 달린 곳에 위치한 작은 섬 히라도. 이곳은 1549년 일본에 와 1550년 히라도를 찾은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최초의 복음의 씨앗을 뿌린 곳이다.

일본의 가톨릭 선교가 시작된 히라도 섬 좁은 해협 위로는 히라도대교가 지나고 있다. 그리고 거센 파도가 철썩이는 해협을 바로 앞에 둔 야이자 사적공원엔 일본의 ‘순교’역사를 상징하는 카미로 콘스탄츠오 신부의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 순교비는 1605년 일본에 입국해 선교활동을 하다 1614년 금교령으로 마카오로 추방된 카미로 신부가 1621년 다시 잠입해 선교활동을 벌이다 다음해 우쿠섬에서 체포돼 화형당했다고 기록한다. ‘선교’가 시작된 곳에서 만난 ‘순교’의 흔적. 461년의 일본 가톨릭역사 또한 순교자의 피땀 위에 쓰인 한국교회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짐작게 했다. 선교와 박해. 순교와 배교. 그리고 잠복의 역사.

가톨릭 신자들이 신앙으로 결속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바테렌(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후 1597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와 예수회 수도사, 신자 등 26명을 나가사키의 니시자카에서 처형하는 등 가톨릭교회에 대한 탄압을 자행했다. 1603년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후 1614년엔 전국에 금교령을 내렸다. 그로부터 금교령이 해제되기까지 259년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철저히 자신을 숨겨야 했던 가쿠레키리스탄, 그들의 흔적을 인근에 위치한 타비라교회당에서 찾을 수 있었다. 타비라교회는 1886년 이후 라게 신부와 도로 신부의 지도로 구로시마, 소토메에서 이주해온 가쿠레키리스탄들이 개척한 교회다. 이곳 공원묘지에는 구로시마의 가쿠레키리스탄 히자카야 일가의 무덤이 안장돼 있다. 박해를 피해 구로시마로 이주해갔던 히자카야 일가는 구로시마의 척박한 땅과 원주민의 텃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라게?도로 신부를 따라 이곳 타비라로 이주해왔던 것이다.

히라도대교를 건너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호오키교회당에 다다랐다. 1898년(메이지31년) 마타라 선교사 지도아래 세워진 이 교회당은 고토섬 우쿠시마 출신 목수 노모토 쇼이치가 지었다. 교회당 안에는 고토지역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백꽃 모양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눈길을 끌었다. 장미꽃이 없어 동백꽃을 꺾어 성모님께 바쳤다던 고토 신자들의 신심이 이곳 호오키교회당에도 꽃을 피웠다. 호오키교회당에선 일채모금(一菜募金)운동이 진행 중이었다. 매주 금요일 한끼 식사는 채식으로 해 아낀 돈을 모아 좋은 일에 쓰자는 취지의 모금운동을 벌이는 일본 신자들이 친근했다.

바다를 왼편으로 끼고 30여분 달렸을까. 뉘엿뉘엿 해가 지는 이키츠키대교를 건너 쿠로세의 쯔지 순교비와 순교자 가스파르 니시의 묘가 있는 이키츠키섬으로 향한다. 1609년 처형돼 이키츠키 최초의 순교자가 된 가스파르 니시의 묘지 앞엔 십자가를 높이 세운 쿠로세의 쯔지 순교비가 있다. 가스파르 니시의 아들 토마스 니시 또한 마카오에서 신학을 배워 돌아온 뒤 1634년 나가사키에서 순교해 나가사키 16성인의 반열에 들었다.

이키츠키섬은 마츠우라 영주에 의해 박해받았던 가쿠레키리스탄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이곳 이키츠키섬 박물관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분을 숨긴채 불교도로 가장하고 살아야 했던 가쿠레키리스탄의 슬픈 역사가 재현돼 있다. 금교령이 내려졌을 당시, 가쿠레키리스탄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후미에(신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십자가를 밟는 것)를 해야 했으며, 집에 돌아와선 죄책감에 시달리며 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때리기도 했다. 하얀 종이를 오려 만든 십자가를 통에 넣어 다니기도 했고, 신앙을 속이기 위해 불상 뒤에 십자가를 그린 것으로 예수상, 성모상을 대신했다. 탱화로 가장한 성모자상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전시실에 들어서니 어두운 방에 숨어 신자들이 함께 바쳤다던 ‘오라쇼’ 소리가 들린다. ‘오라쇼’는 가쿠레키리스탄들이 구전으로 전해듣고 외우던 라틴어 기도문이다. 259년을 전해내려오면서 발음도 의미도 달라진 이상한 노래, 알지도 못하는 낱말의 조합을 전해들은대로 무조건 외운 것은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가쿠레키리스탄들의 간절한 희망의 소리가 아니었을까. 뜻도 알지 못한 채 가슴 졸이며 오라쇼를 읊는 그들의 모습을 그날 밤 꿈속에서 만났다.

이튿날, 구로시마행 쾌속선에 올라탔다. 히라도 영주의 방목지였던 구로시마는 소나 말을 관리하던 불교도 외엔 달리 취락지가 형성돼 있지 않던 척박한 땅이다. 그곳에 사람의 눈을 피해 섬 뒤쪽으로 몰래 숨어들어가 지내던 구로시마의 가쿠레키리스탄의 흔적이 있다. 인구 85가 가톨릭 신자라는 신앙의 섬 구로시마의 베일을 벗기려는 듯, 쾌속선은 바다를 반쪽으로 가르며 달렸다. 40분쯤 달렸을까. 눈앞에 섬이 나타났다.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듯 습한 바닷공기에 구로시마(黑島)의 검은 화강암 내음이 실려왔다.



가톨릭신문  2010-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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