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생명의 문화] 생명존중의 생명과학적 의미 ④생명체의 종말

삶과 죽음 경계 구분 짓기 어려워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 김원선(서강대학교 생명과학과 교수,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위원)
 

  가끔 큰 병원 화장실에 가면 여기저기 장기매매를 암시하는 듯한 섬뜩한 광고가 보인다. 죽어가는 자식이나 부모를 앞에 둔 가족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간절한 소망을 악용하는 천박한 생명경시 풍조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내내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사실 헌혈이나 장기기증이 얼마나 숭고한 휴머니즘의 실천인지는 새삼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심장과 같은 하나밖에 없는 장기는 사후에야 기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살아있음`에 대해 대조적으로 사용되는 `죽음`의 생물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죽음은 생물의 특성을 유지시켜 주는 생물학적 기능이 정지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증한 장기가 살아있기에 이식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이미 죽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사망선고가 생명현상의 완전한 정지는 아니다. 왜냐면 생물체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가 사망선고가 내려짐과 동시에 일제히 생명현상의 정지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살아있는 생명체의 경우에도 한편에서는 세포가 죽어나가고 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 몸의 피부 및 장기에서는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한쪽에서는 세포가 죽어나가고 있지만 또 다른 한쪽에서는 조직에 내재하는 줄기세포에 의해 새로운 세포가 보충된다. 적혈구도 120일 정도 수명을 다하면 지라에서 파괴되지만, 골수에서는 새로운 적혈구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따라서 생명체는 삶과 죽음이 동시에 교차하는 장(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죽음이 없는 삶이란 상상할 수 없다. 일종의 재창조를 위한 건설적 파괴를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호흡, 심장박동 등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는 몇 가지 생명활동의 근거를 바탕으로 해서 사람의 죽음을 판정했다. 그러나 과학과 의학의 발전은 우리 죽음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꿔 놓았다. 의료 기술의 발달로 인공호흡 및 심폐소생술을 통해 최소한의 호흡과 심장박동을 지속시킬 수 있는 생명연장 방법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죽음을 판정하는 것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아직 현실성은 매우 낮지만 `냉동인간`이라는 단어도 가끔 해외토픽에 등장한다. 의학적으로는 `지속적 식물 상태` 또는 `비가역적 혼수상태`로 표현되는 환자를 사망했다고 판정하기에 이르렀다. 왜냐면 이들의 경우 뇌의 손상이 너무 심해 현대 의학으로는 다시 회복되기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대의학의 발달과 더불어 성공을 거두기 시작한 장기이식 기법의 출현은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문제는 죽어가는 환자를 살릴 충분한 장기를 확보할 수 없다는 현실이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맞춰 1968년 하버드 의과대학은 뇌 기능의 정지 즉 뇌사를 기준으로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어떻게 보면 현재의 사망 판정은 필요에 따른 작위적 판단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생물학적 측면에서 엄밀하게 본다면 죽음은 생명의 특성이 모두 종료된 상태를 의미하며 뇌사, 호흡정지, 심장박동 정지 등도 `죽어가는 과정 (dying process)`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어가는 과정은 언제 시작되는가? 역설적이지만 죽음은 생명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점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손의 손가락이 갈라져 있는 것은 손가락 사이 세포가 죽기에 가능하며, 그 프로그램은 이미 유전정보로 내장돼 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오리 다리의 물갈퀴 같은 기형이 나타나게 된다. 또 삶의 과정에서 적혈구나 상피세포와 같이 손상된 세포는 계획된 사멸 과정을 거쳐 제거되고 그 빈자리를 새로운 세포가 채우게 된다.

 따라서 한 개체의 입장에서 죽음은 항상 우리와 같이하고 있다. 다만 신체의 물질적 노화가 더 이상 전체로서의 조화로운 삶을 지탱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총체적 죽음이라는 현실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생식이라는 방법을 통해 종으로서의 영원한 삶을 가능케 하는 생명의 질서를 부여하심으로써 이 세상을 늘 보시기에 좋게 하고 계시다 (창세 1장 참조). 본래 시작도 끝도 없는 생명일진대 죽음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 짓겠다는 시도 자체가 우리의 능력 밖에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어떻게 주어진 삶을 풍성하게 살 것인지 고민해야 하겠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2-08-26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5. 3

시편 59장 10절
저의 힘이시여, 당신만을 바랍니다. 하느님, 당신께서 저의 성채이시기 때문입니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