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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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지금-죽음을 준비합시다](8)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관

믿음, 사랑 깊을수록 두려움 멀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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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환 추기경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한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셨음을 가슴 깊이 새기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장 좋은 죽음 준비라고 했다.
사진은 2005년 5월 성가정입양원을 방문한 김 추기경 모습.
 

지난 2월 16일 세상을 떠난 김수환 추기경은 `좋은 마무리`라는 선종(善終)의 의미를 온몸으로 일깨우면서 우리 사회에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고, 가진 것을 남김 없이 다 주고 가겠다며 장기기증 서약까지 했던 김 추기경이 `좋은 삶, 좋은 죽음` 증후군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오랜 세월 김 추기경을 옆에서 지켜본 이들은 김 추기경이 죽음을 친구처럼 여기며 지냈다고 입을 모은다. 김 추기경에게 죽음은 어떤 친구였을까. 다음은 김 추기경이 10여년 전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가 발행하는 격월간지 「삶과 사랑과 죽음」에 실은 글이다. 죽음과 죽음 준비에 대한 김 추기경의 진솔한 고백을 담은 이 글은 아름다운 삶과 죽음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잖은 용기와 희망을 줄 것이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죽음을 생각할 때 어쩔 수 없이 먼저 느끼는 것이 두려움이다. 나는 가끔 죽음과 마주 서 있는 환자를 방문하게 된다. 대부분 말할 수 없는 큰 고통과 함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할 때 그것이 조만간 나의 것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모른다. 거기에다 한 생을 살아오면서 이래저래 지은 죄도 많은지라 하느님 심판대에 나서기란 참으로 두렵고 떨리지 않을 수 없다. 되도록이면 고통이 적고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고 생각하지만 마음대로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지난달에는 내게 가장 오래된 친구가 죽었다.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는데, 잠시 앓고 가기 전날까지도 정신이 맑고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참으로 선하게 살다가 선종한 것이다. 그의 부음을 듣고 달려가 영전 앞에서 고인을 위해 기도드릴 때 나는 그가 이미 하늘나라에 있으리라 믿고 나 역시 남은 생애를 선하게 살다가 선하게 죽을 수 있게 해 주십사 빌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이 마셔야 할 쓴 잔이다. 예수님도 아버지께 할 수만 있다면 면하고 싶다고 하신 그 고뇌의 잔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하느님은 왜 인간에게 이 죽음의 굴레를 씌우셨는가. 성경에 의하면 죽음은 인간이 하느님을 거슬려 죄를 범함으로써 초래된 결과이다.

 핵심 문제는 죽음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죽음은 생명의 끝인가, 아니면 저승 삶의 시작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아무도 이렇다 저렇다 과학적 실증을 통한 답을 줄 수는 없다.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는 죽음은 현세 삶의 끝일지언정 그것이 만사를 무(無)로 돌리는 종말이라고 보지 않는다. 특히 그리스도교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사도신경 말미에서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한다.

 바오로 사도는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있어야 함과 그것이 없으면 우리 믿음도 헛되다는 것을 누누히 강조하면서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53)라고 천명한다. 이 믿음에 따르면 죽음은 우리를 죄와 이로 말미암은 온갖 고통과 불행, 인생의 질고로부터 해방시켜 복된 생명으로 옮겨다 주는 것이다. 따라서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감`이다.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이같은 가르침의 근거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성취된 파스카 신비에 있다. 믿는 이에게 죽음은 파스카 신비의 구현이다. 예수님은 참으로 죽음을 쳐 이기셨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고 하셨다. 여기서 세상이란 예수님의 구원이 없었다면 결국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그 세상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무엇인가. `죽음의 관문`이라는 표현도 있듯이 죽음은 하나의 과정이다.어떤 이는 `죽음은 아직 펴보지 않은 책과 같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 책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기쁨과 행복, 사랑과 평화, 빛과 생명을 가득 담고 있다.

 죽음에 대한 이런 생각은 죽음을 너무 미화하는 것은 아닌가. 미화는 결코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사람이 되어 오시어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죽음을 달리 볼 수 있다. 사랑은 파괴하지 않고 건설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 그렇다면 하느님이 사랑을 다하여 당신 모습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신 인간을 죽음으로 끝나게 버려두실 수는 없다. 사도 바오로는 죽음 뒤에 우리가 누릴 행복이 얼마나 큰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1코린 2,9).

 그러나 죽음을 통해서 참되고 아름답고 복된 새 생명에 들어간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의 고통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그리스도인에게도 간혹 예외적인 경우가 있을 수 있겠으나 여전히 두렵고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이요 고뇌일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도 죽음 앞에 섰을 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할 것이다. 이것은 살고 싶은 인간 본성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결국 당신 사랑과 그 사랑이 베푸는 죄의 사함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으로 이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죽음에 대한 좋은 준비는 나날이 이 믿음을 깊이 사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주님이 우리를 한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셨음을 상기하면서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특히 가난한 이, 병든 이, 고통 속에 갇힌 이 등을 형제적 사랑으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가난한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사람은 본인이 깨닫든 못 깨닫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죽은 다음 분명하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를 보잘 것 없는 형제 하나를 사랑한 것이 당신을 사랑한 것과 같다고 하시면서 하느님이 영원으로부터 마련하신 나라를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하느님 사랑을 믿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좋은 죽음 준비이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09-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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