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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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문화] 생명의 아름다움과 사회적 죽음

잘못된 죽음에 맞서 싸우는 것, 아름다운 생명 문화 지키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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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승환 교수(가톨릭대 철학과,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위원)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새해에 떠오르는 해는 삶의 충만함은 물론, 다른 생명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충분히 아름답다. 그래서 이 날은 평화의 날이며 생명의 시간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마음이 함께 하는 의미로 충만한 시간이다.

삶을 의미있게 하는 죽음

 그러나 이런 생명의 시간이 여전히 고통으로 이어지는 삶이 있다. 오늘 이 아름다움과 의미의 충만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우리 이웃에.
 
  죽음을 기억하고 죽음을 앞당겨 현재화함으로써 삶이 충만해지고, 삶의 의미를 되돌아 볼 수 있다는 말은 결코 죽음에 대한 축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그 자체로 생명의 원수이며 삶의 독침이고,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적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죽음이란 사건이 우리에게 의미있는 것은, 이렇게 우리에게 필연적 사건인 죽음을 앞당겨 성찰하고, 그 의미를 되돌아봄으로써 새로운 삶의 지평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죽음에의 성찰을 통해 일상의 삶에 깃든 의미와 생명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기 때문이지 죽음이 그 자체로 축복인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죽음을 되돌아보지 못하고 아무런 의미 없이 맞게 되는 죽음을 피해야 하는 것이다. 무의미한 죽음, 강요된 죽음, 다른 사람의 욕망과 목적 때문에, 인간에 의한 죽음의 폭력은 거부하고 그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생명을 위한 싸움, 헛된 죽음과 강요된 죽음에 맞서는 것은 생명을 지키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용산의 죽음`을 예로 들어본다. 철거민의 행동과 진압과정, 부분적 해결 이후 사태 진행에 대해서는 사회를 이해하는 눈과 자신의 위치에 따라 다른 판단을 할 수도 있다. 사실 그런 차이에 대해 뭐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견해 차이 때문에 죽어간 그들 생명의 고귀함과 남아있는 가족들의 고통에 침묵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죽임의 문화에 침묵하고, 그러한 강요된 죽음, 무의미한 죽음에 눈감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행동일 수는 없다.

 그 죽음에,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하고 답할 수는 없다. 이 죽음에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마태 27,24)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그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행동일 뿐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죽음의 죄를 추궁받게 될 것이다. 부분적으로 이뤄진 해결에 대해서도 주류 언론은 죽음에 이른 불의보다 죽음을 둘러싼 거래와 타협에 더 무게를 두는 보도를 했다. 그들 마음에 깃든 반 생명성 문화는 물론, 생명의 존엄성을 보지 못하는 무지와 몰염치가 느껴질 뿐이다.

죽음의 문화 거부해야

 물론 우리 모두가 직접 행동해야 한다거나, 또한 그렇게 행동하라고 충동질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존재로 일상적인 무의미한 죽음, 잘못된 죽음과 사회적 죽음을 거부할 수는 있는 것이다. 그 죽음이 잘못됐다고 선언하고 그 죽음에 책임을 추궁하고, 죽임의 문화를 거부하는 실천과 행동이 사회적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적지 않다.

 내 마음 속에 깃든 이러한 사회적 죽음을 묵인하는 욕망과 비겁함에 대해 "아니오!"하고 말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죽임의 문화를 거부하는 길을 닦을 수 있다.

 어떤 경우라도 나와 우리로 인해 일어난 죽음을 하느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결코 우리의 침묵으로 인한 결과를 하느님 뜻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 책임을 하느님께 돌리는 행동이며, 하느님을 미봉자(Deus ex machina)로 만드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이 존중받고, 생명의 아름다움과 의미가 살아나는 것은 우리가 지금 행하는 생명의 문화에서야 가능하다. 무의미한 죽음, 사회적 죽음, 생명이 죽어가는 죽임의 문화는 우리의 침묵, 우리의 나태와 무관심이 빚어낸 결과이다.

 우리의 행함과 행하지 않음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생명을 살리는 문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다만 나만의 거룩함, 나만의 성사와 영성에 빠져 생명의 문화에 침묵할 때 그 나만의 영성에, 나만의 죽음에 대해 다른 이들도 무관심할 것이며, 공동체 역시 침묵할 것이다.

 잘못된 죽음을 내버려두고, 그 탓을 하느님께 돌리는 것은 하느님 부재는 물론, 죽음의 문화를 부추기는 잘못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의 아름다움과 의미의 충만함, 생명을 살리는 문화를 생각한다면 침묵해서는 안 된다. 우리 안에 똬리를 튼 죽음의 문화를 쫓아내야 할 것이며, 나아가 생명을 위한 작은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럴 때만이 생명은 생명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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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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