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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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문화] 죽음의 아우성

신승환 교수(가톨릭대 철학과,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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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서 처음으로 발병했던 구제역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지금까지 돼지 315만 마리, 소 15만 마리를 살처분했다. 살처분은 전염병에 걸린 동물을 도살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번 경우는 결국 소와 돼지를 미처 도살하지 못해 산 채로 땅에 묻었다. 살아있는 생명을 다만 인간이 아니란 이유로, 또한 인간만을 위해서 생매장한 것이다. 330만 마리의 살아있는 생명체를 생각해보라.

죽음이 죽음으로 몰아

 창조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모든 생명체는 그 자체로 고귀하다고 말한다.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생명체는 창조의 신비를 달성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 신비를 간직한 생명체가 자신의 존재의미를 달성하는 것, 그래서 생명체가 서로의 생명을 지켜가도록 하는 것이 하느님의 창조 의지임을 성경은 거듭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이 참된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으며, 생명이 생명으로 존재하려면 창조 질서가 유지돼야 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창조 의지를 이뤄갈 때 가능하며, 또한 창조 질서를 실현하는 데 생명이 존재하는 까닭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을 성경은 정의와 평화로, 또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는"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고", 어린아이가 살모사의 굴에서 장난치며 놀 수 있는 세상, 그래서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는"(이사 11, 6-9, 공동번역) 곳이 생명의 자리이다. 창조의 신비가 달성되지 않은 이 땅에서는 이러한 정의와 평화는 깨진 채로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예언자를 보내시어 거듭 생명을 살리는 정의와 평화를, 생명이 서로를 아끼고 서로를 지켜주는 사랑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느님은 창조하신 모든 것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으시며, 생명이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정의로울 것을 요구하신다(이사 42, 5-6).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문화를 보라. 인간 탐욕과 자본주의적 욕망에 의해 이런 창조질서는 산산이 깨지고, 곳곳에서 죽음의 소리가 커지고 있다. 동물의 고기를 탐욕하는 인간의 욕망, 생명의 원리를 정면으로 배반하는 사육 방식 때문에 이런 떼죽음과 생매장이란 반생명적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저 죽음의 아우성은 누가 듣고 있는가. 그 죽음의 비명은 전적으로 우리들 인간이 책임져야할 일이다. 현대의 인간은 자신의 탐욕에 의해 생명을 해치는 나쁜 존재, 창조 의지와 질서를, 그 신비를 깨트리는 가장 반생명적 존재가 아니란 말인가. 구제역을 초래한 그 욕망이 인간 생명까지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4600여 곳에 산 채로 매장된 동물의 피와 고름이 자연과 생명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 사람들은 거기서 흘러나오는 침출수에 의한 상수원 오염만 두려워한다. 생명이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가는데 자신들이 마실 물만 안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다른 생명체를 필요로 한다. 직접적으로 생명체를 섭취해야만 살아갈 수 있음은 생명에 내재한 모순이다. 그럼에도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생명체로 존재하기 위해 다른 생명과 함께 살아가며, 자연 질서가 유지되고 지켜질 때 참되게 살아갈 수 있다.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같은 생명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공동의 존재이다. 미시적 차원의 투쟁과 거시적 차원의 공존이란 모순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 크심에 기대어, 그분의 자기비움(kenosis)을 통해 생명의 모순을 넘어 그 모순을 통일(coinci dentia oppositorum)시켜가야 하는 존재의 과제를 지니고 있다. 그 자신이 피조된 생명이지만 자신의 존재와 결단에 따라 생명의 미래를 결정할 권한을 지닌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와 당신, 그리고 하느님 백성이 모인 교회는 이러한 생명의 과제를 지닌다. 생명으로서 우리는 누구도 이런 의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죽음의 문화를 거부하고, 생명의 문화를 건설하기 위한 과제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이기는 것이며, 탐욕과 모순에 찬 자신의 내면을 뉘우치고 돌아서는 길에서야 가능할 것이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이 생명의 과제를 이뤄가야 한다. 성직자는 사목으로,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침을 통해,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의 자리에서, 그 어떤 삶의 자리에서든 우리는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가야 할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정의와 진리를 통해, 삶의 작은 일상을 통해서, 또는 낯선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이런 과제를 달성해 가야 할 것이다.

 죽음의 문화는 다른 누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 의해 빚어진다. 생명의 문화 역시 바로 그 안에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어떤 문화를 만들어갈 것인가. 온갖 탈을 쓰고 내면 깊숙이 꼭꼭 숨겨둔 우리들 자신의 욕망과 절제하지 못함, 비움(kenosis)의 신비를 보지 않으려 하면서 온갖 명목으로 합리화하는 나의 어리석음이 죽음의 문화를 초래하는 제일 큰 원인이다.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막는 윤리도 중요하지만, 생명의 문화를 위해서는 훨씬 더 큰 존재론적 전환이 필요하다.

생명의 질서 지켜야

 죽음의 문화를 초래하는 우리들의 숨겨진 욕망에서 벗어나 생명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정의로움을 키워가야 한다. 생명을 이해하고 살리기 위해 교육하고, 생명을 살리는 문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교육과 문화는, 우리 삶의 자리는 결코 나 자신의 영광이나 관심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과 삶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의 존재를 달성하는 참된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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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1-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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