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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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교회가 간다 Ⅱ] 캄보디아 / 5. 스탱트렁 본당 주임 박서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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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식비 6만원 “그래도 호강이죠”

무료병원 설립 월 900명 진료
주민들 “신부님이 예수님 같아요”

[캄보디아=우광호 기자]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어느 정도 어렵게 살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열악한 환경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새벽 5시에 프놈펜을 출발, 자동차로 9시간을 달려 도착한 스탱트렁(Stung Treng) 성당. 한국외방선교회 박서필 신부가 캄보디아 농촌 남성들의 평상복인 크로마를 입고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배고프지요. 밥부터 먹읍시다.” 식복사? 물론 없다. 박신부가 직접 요리를 했다. 귀한 손님이 왔다며, 얼마 전 한국의 한 신자가 보내준 김과 김치를 내놨다. 기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주일 전부터 아껴두었던 반찬이라고 했다. 시장에서 미리 장봐둔 생선도 식탁에 올렸다. 평상시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성찬이란다. 기자는 염치없게 마지막 남은 김치 한 조각, 김 한 조각까지 싹싹 비웠다.

박신부의 월 생활비는 100달러(한화 약 10만원). 60달러가 식비고, 나머지 40달러가 용돈이다. 차는 없고 낡은 오토바이가 유일한 이동수단이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냉장고가 없는 탓에 음식은 그때그때 필요한 것만 사서 먹는다. 박신부가 “아! 참”하더니, 식탁에 모기향을 피웠다. 해가 머리 위에 떠있는데도 모기떼가 극성을 부렸다.

마당에 있는 채송화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오는 사람들은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느냐고 말하지만, 그나마 캄보디아 사람들에 비하면 이렇게 사는 것도 사치일지도 모릅니다. 우물도 없는 집이 많은데, 저는 그나마 이렇게 마당에 (물을 줘가며) 채송화를 키울 수 있는 여유를 부릴 수 있잖아요.”

스탱트렁 본당에 부임한지도 벌써 만 4년을 바라보고 있다. 가장 먼저 울타리를 치고, 우물을 팠다. 성당도 ‘뚝딱뚝딱’ 보수하고 이곳 저곳을 손봤다. 그런데 정작 사제관은 수리하지 않았다. “다음에 이곳에 올 신부를 생각하면 미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본부(외방선교회) 사정이 열악한데, 어떻게 내가 이곳에서 편안하게 지내겠습니까. 웬만하면 몸으로 때워야지요.”

자신을 위해서는 그렇게 돈을 아끼는 박신부가, 남을 위한 일에는 ‘펑펑’이다. 집이 없어 길거리에서 죽어가던 할머니와 할아버지 2명을 성당으로 모셔와 말벗으로 삼았다. 할머니는 최근 돌아가셨고, 지금은 할어버지 한 분만 성당에서 생활하고 계신다. 할아버지를 모시면서 한 달에 60달러라는 거금(?)이 추가로 들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모른채 할 수 없는 것이 사제의 마음다.

오갈데 없는 노인 모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박신부의 씀씀이는 이뿐 아니다. 서울에 있는 몇몇 의사들의 도움을 받아 지난 2004년 10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병원을 설립했다. 캄보디아 의사와 간호사를 고용, 현지인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입소문이 퍼지면서 갈수록 환자가 늘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환자가 월 500여명 선이었지만, 올해 들어서는 월 700~900명을 넘고 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운영비. 어쩔 수 없이, 병원 앞에 “정말로 가난한 사람만 진료가 가능합니다”라는 안내문을 써 붙였다. 앞으로는 진료 카드도 별도로 만들어, 가장 어려운 사람을 우선으로 치료할 계획이다. 하지만 말이 병원이지, 제대로 된 의료장비가 없어 간단한 진료만 가능하다.

수술을 필요로할 경우 인근 대형 병원에 주선하고 수술비 및 입원비, 심지어는 차비까지 지원해 준다.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많은데, 도움을 주지 못할 때가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돈이 없어서 제대로 진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박신부가 가정방문에 나섰다. 오토바이 뒤에 앉아 운전하는 박신부의 허리춤을 잡았다. 10여 분 뒤 마을 하나가 나타났다. 15년 어부생활을 했다는 헤잉(43)씨, 자녀를 학교에는 보내지 않아도 성당에는 꼭 보낸다는 따사으(75)씨 가족, 집 지을 땅이 없어 선상주택에서 살아가는 트응(38)씨….

박신부를 만난 신자들은 한결 같이 환한 미소로 반겼다. 고기잡이가 주업인 사람들. 어디에 그물을 치면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는지, 언제 강으로 나가면 물고기가 많이 몰리는지 눈감고도 훤히 안다고 했다. 이 ‘베드로’의 후예들은 한결같이 “박신부님 오시기 전에는 거의 미사를 드리지 못했는데, 이제는 매 주일 미사를 드릴 수 있으니까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박신부님이 예수님 처럼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는 것이 가장 기쁩니다”라고 말했다. 3~4년 이상 철저한 교리를 거쳐 세례성사를 받기 때문에 냉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번 신자는 영원한 신자인 셈이다.

10여 신자 가구를 방문한 박신부가 오토바이를 시외 지역으로 돌렸다. 한 10여분 달렸을까. 들판 위에, 쓰러져 가는 판자집들이 밀집해 있었다. 오저띠을 마을. 50여 가구가 숯을 만들어 팔며 어려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박신부가 “나는 호강하며 산다”고 말한 것이 ‘참 말’이었다. 지난해 3월 들불이 마을을 덮친 후 아직도 집이 제대로 복구되지 않았다. 우물도 없다. 아파도 병원에 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학교를 가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고, 공동 화장실도 필요하다. 박신부는 이들을 위해 당장 급한 생활 자금을 빌려주고 연 2의 이자를 받는다. 물론 이자는 전액 마을 공동 발전기금으로 사용된다. “아무도 이들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교회가 옆에서 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청소년 기숙사 지을것

박신부는 스탱트렁에서 차로 5~6시간 가야하는 나타나끼리 지역을 떠올렸다. 그곳은 이곳보다 사정이 더 열악하다고 했다. 박신부는 공부의 기회에서 소외된 그곳 청소년을 위해 기숙사를 지을 계획이라고 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제 여력이 모자라네요.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들어주시겠지요.”

박신부와 함께 성당으로 돌아왔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전기, 전화, 냉장고, 텔레비전, 컴퓨터, 자동차, 라디오…. 당연히 늘 옆에 두고 있던 익숙하던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불편했다. 하지만 박신부는 전혀 불편해 하는 기색이 없었다. 박신부가 모기장을 치고, 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성무일도 기도를 했다. 이름 모를 벌레 소리가 사제관 안에 가득했다.

■ 캄보디아 선교에 도움주실 분 :
한국외방선교회 02-3673-2525, 우리은행 1002-429-982489 예금주 정두영 신부


사진설명
▶박서필 신부가 지난해 3월 들불로 큰 피해를 입은 오저띠을 마을을 찾아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위 왼쪽).
▶선상 주택 방문, 박서필 신부가 집 지을 땅이 없어 선상 주택에서 생활하는 한 신자가정을 방문하기 위해 물을 건너고 있다(위 오른쪽).
▶박신부가 사제관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무료병원 상담, 한 캄보디아 모녀가 박서필 신부가 운영하는 무료 병원을 찾아 진료를 상담하고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0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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