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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소통을 향하여 16】비주체적 신앙 실천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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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한 교황 위한 기도 없어

지금까지 황사영 사건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 정체성을 민족 정체성과 연관지어 살펴보았다. 이를 통하여 교회가 자기의 정체성을 건강하게 구현할 과제를 자각하는 기회를 열고자 하였다. 이런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정체성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그리스도교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할 때 교회 내에서 발생시킬 수 있는 아픔을 실례를 통하여 짚어보고자 한다.

스스로 필요한 기도 못해

2005년 4월 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거하였다. 우리나라 시각으로 3일 새벽에 운명 소식이 전해졌고, 이날은 부활 다음 주일이었다. 교황 서거가 알려지자, 전국 언론사들이 소식을 전하면서 교황 특집을 마련하였고, 일반인들도 조문하였다. 이날이 주일이었으므로 특히 많은 신자가 미사에 참여하여 교황의 귀천을 기억하고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기를 기도하였다.

그런데 신자들 가운데 뜻밖의 체험을 하는 예들이 나타났다. 주일 미사 때 신자들의 기도 시간에 돌아가신 교황을 위한 기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파견 직전 공지 때 사제가 교황 서거에 대해서 언급하기는 하였다는데, 이런 사태가 어느 한 교구, 어느 한 본당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여러 교구 여러 본당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였다. 수도권 지역에 사는 어느 본당 신자는 낮미사에서 미사 시작 때도, 신자들의 기도 때도 교황을 위한 기도가 없어서, 저녁 청년 미사에 다시 가 본 적도 있다고 했다. 이번에도 역시 신자들의 기도 때 교황을 위한 기도가 없어서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그냥 넘어갔었다는 것이다.

왜 이런 사태가 발생하였을까? 우리 신앙 공동체가 주체적으로 미사를 드리는 데, 다시 말해서 자기의 신앙의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구현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사 전 해설도, 신자들의 기도도 주어진 대로, 많은 경우 ‘매일미사’에 나온 대로, 행해 왔던 것이다. 매일미사가 제작되고 나서 서거한 교황을 위하여 스스로 기도 공간을 만들어 가는 데 요청되는 주체적 신앙살이가 한편으로 위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체적으로 신앙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데 한계를 드러낼 경우 교황의 서거에 직면해서조차 이렇게 참담한 자기 소외를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본당들이 어디어디였는지 알고 싶어하고, 매일미사 책을 계속 제작할 것인가 여부를 논하는 것으로 이 사태의 핵심을 흐리지 않아야 한다.

매일미사는 제작할 수 있다. 그것을 주체적으로 활용한다면 그것이 지닌 장점을 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본당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하는 것으로 이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다음에는 신자들의 기도 때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지 하고 다짐하는 것으로 이 사태의 비극성이 해소되지도 않는다. 이 사건의 근본 문제는 자기 신앙 공동체가 살아 생동하는 신앙을 실천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놓여 있다. 신자들이 주체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의 정체성을 돌볼 줄 알 만큼 신앙의 성숙을 이루고 있는가가 관건인 것이다.

신앙정체성 종속의 결과

평신도들이 그리스도교 정체성을 스스로 성찰하고 수도자나 사제들과 진정으로 한 형제자매로서 신앙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나눌 수 있는 구조가 되어 있는가? 사제들은 주교들과, 주교들은 교황청 지도부와 하느님의 생명의 다스림을 준거로 자신들의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을 구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대화의 지평을 열어 갈 틀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 신앙 공동체는 어쩔 수 없이 이와 유사한 신앙 실천의 비극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 신앙 실천이란 근본적으로 신앙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와 그 구현이기 때문이다. 자기 공동체의 최고 지도자가 서거하였어도 교회 전례의 정점인 미사에서조차 그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마음에서만 말고, 공적으로 함께 기도할 줄 모르는 이 비극은 바로 이같은 유형의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의 종속에서 오는 것이다.

당연히 모든 사제와 주교와 교황의 올바른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도, 우리 교회는 앞으로 어떻게 풀어 갈 것인가, 교회 지도자들 상호간에는 물론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종속성을, 온 신자 공동체의 주체적인 자기 정체성 구현을 어떻게 북돋고 성장하게 할 것인가, 우리 교회는?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0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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