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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사제열전] 15. 방유룡 신부(상)

완덕의 길을 걸으며 한국적 수도원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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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유룡 신부
 

   가난과 함께 한 생애를 살아간 사제. 한결같은 침묵과 열심한 신앙으로 완덕의 길을 걸은 사제. 무엇보다 겨레 복음화와 한국적 수도원 설립이라는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한국천주교회에 영성의 큰 발자국을 남긴 큰 스승. 무아(無我) 방유룡(1900~1986) 신부였다.

 방 신부는 특히 전 교회가 하느님 가족으로 살며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건설하는 꿈을 꿨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휘장은 형제애"라고 노래했고, 하느님 사랑의 불을 세상에 타오르게 하기 위해 순간의 놓침도 없이 사랑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수도회 주보를 한국 순교자로 정해 순교정신으로 이 사명에 신명을 다하도록 했다.

 
 1900년 3월 6일 서울 정동에서 태어난 방 신부는 부친 방경희(베드로)와 모친 손유희(아녜스)의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자랐다. 본관은 온양, 세례명은 레오, 수도명은 안드레아였다.

 조부 방제원(프란치스코)은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 초대 연길지목구장 및 대목구장을 지낸 브레허 주교아빠스에게 한문과 한글을 가르친 뛰어난 한학자였다. 부친 또한 궁내부 주사이자 주한 영국공사관 통역관을 지낸 지식인으로, 후일 지방 군수가 됐으나 향교에서 지내는 제사 문제로 관직에서 물러날 만큼 신앙심이 깊었다.

 3대의 대가족 집안에서 15살까지 한학을 익힌 소년 방유룡은 정동관립보통학교 4학년에 입학해 이듬해에 졸업한 뒤 미동농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고 졸업했다.

 신학교에 들어간 것은 그의 나이 18살이었다. 1917년 9월 15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초기 사제성소를 의심받을 정도로 말썽 많고 멋쟁이로 소문난 학생이었다.

 그의 신학교 입학 동기생인 임충신(마티아) 신부는 훗날 방 신부가 선종한 뒤 장례미사 강론에서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이제 우리는 성인 신부를 잃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신학교에 입학하며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그가 성인이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시절 방 레오의 모습은 아주 거만하고, 사치스럽고, 또 장난이 심해서 대부분 시골 출신이던 우리들과는 퍽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 레오가 신학교에서 쫓겨나거나 아니면 자진해 나갈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계획은 우리들 보잘것없는 인간들 안목과는 달랐습니다. 두 번째 방학에서 돌아온 그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변했습니다. 새까만 무명 두루마기에 동정도 달지 않은 옷을 입고 가난한 수도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 모두 앞에서 `오늘부터 나는 성인이 될 것이다`고 선언했습니다. 이후로 그는 규칙을 철저히 지킬 뿐 아니라 농담도, 장난도 없이 언제나 침묵 속에 머물렀습니다."

 20살이 되던 방학 중에 전 생애를 전환시킨 회개를 경험한 후 그는 `수사`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영육 간 변화된 생활로 주위를 탄복케 하며 소신학교 6년, 대신학교 6년을 거쳐 1930년 10월 26일 사제품을 받았다.


 
▲ 1926년 5월 23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재학 중 삭발례를 기념,
수단을 갖춰 입은 방유룡(두 번째 줄 가운데) 신학생.

 그의 사목 생활은 1930년 11월 춘천본당(현 춘천교구 죽림동주교좌본당) 보좌신부를 시작으로 황해도 장연ㆍ재령ㆍ해주ㆍ개성본당, 서울 가회동ㆍ제기동ㆍ후암동본당 주임에 이르기까지 25년간 이어졌다. 10여 년간 신학교 생활이 한결같은 침묵과 열심한 신앙으로 걸어간 완덕의 길이었던 것처럼, 25년간 사목생활도 돈이나 물질적인 것과는 동떨어진 가난하고 청빈한 사목적 삶이었다.

 방 신부의 관심은 오로지 영적 사정뿐이었다. 사제관 방 문 위나 제의방 문 위에 빈틈없이 많은 기도문을 써 붙이고 들며 날 때마다 그 모두를 빠짐없이 외웠다. `성인이 되겠다`는 결심은 그에게 자연스럽게 수도성소를 자문하게 했을 뿐 아니라 겨레 성화를 위해 한국 수도원의 설립이라는 필연적 소명을 갖게 했다.

 회심 이후 20여 년간 한국인 심성에 맞는 수도생활을 모색하던 방 신부는 드디어 1946년 4월 21일 개성에서 한국 순교자들을 주보로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설립한다. 이로써 방 신부는 한국에서 본토인 수도회를 설립한 첫 한국인 사제가 됐다.

 1953년 10월 30일에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를 창립했다. 이어 1955년 10월 후암동본당 재임을 끝으로 본당 사도직을 떠나 자신이 설립한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수도자가 돼 수도생활에 전념하며 수녀, 수사들의 영적 지도자가 됐다.

 1957년 5월 6일에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종신서원을 한 뒤 총장에 취임했다. 방 신부는 1984년 10월 20일까지 27년간 총장을 지내면서 1957년 3월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외부회`를 설립했고, 1962년 10월 1일에는 외부회원 중 미망인 공동체인 `빨마회(현 한국순교복자빨마수녀회)`를 설립함으로써 한국순교복자 수도 대가족의 사부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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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사진제공=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한국순교복자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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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0-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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