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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100주년 특별기획 - 다시 읽는 드망즈 주교 일기] (11) 1914년 9월 18일~12월 31일

전쟁의 참상 속에서도 성소의 ‘희망’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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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징집됐던 드망즈 주교와 동료 선교사들은 다행히 징집유예 통보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 10월, 드망즈 주교는 성 유스티노 신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준공하고 첫 신입생을 입학시킨다.

12월 31일 일기를 보면, 그는 ‘1914년은 신학교가 개교하고 전쟁이 시작된 해’라고 정리했다. 그만큼 전쟁과 함께 성 유스티노 신학교 건립은 그에게 중대한 의미로 자리한 것이다. 전쟁의 참상 속에서도 신학교는 문을 열었고, 신입생들이 입학했으며, 신부들은 가르침을 계속했다. 가장 어두울 때 우리는 ‘희망’을 본다.

1914년 9월 18일~10월 4일

미국에서 온 편지에 의하면 ‘송금이 가능하기만 하면 곧 신학교 장학금을 보내겠다’고 한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12명의 신학생들이 개학이 연기된 것을 모르고 처음 정한 날짜인 9월 19일 도착했다.

10월 1일, 신학교 신부들이 신학생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일과 파공첨례(의무축일) 때는 주교관에서 식사를 할 것이고, 커피 타임이 있을 때는 커피를 마시러 올 것이다.

3일, 성 유스티노 신학교가 처음으로 신입생을 받았다. 학생은 57명이다. 나는 다음날 8시30분 신학교와 성당을 강복했고, 2시30분에 14처를 세웠다.

(이 당시 ‘페랑 신부와 신학생 야마구치’의 사진을 볼 수 있다. 1898년 부산에서 출생한 야마구치는 나가사키와 대구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했지만, 심내막염으로 1923년 5월 부산에서 선종했다.)

11월 8일~12월 10일

칭다오(靑島)가 어제 함락됐다고 해서 오늘 일본인들은 도처에서 이 승리를 축하했다.

서울에서는 일본인들이 무례하게도 성 베네딕도회의 독일 신부들에게 그들의 학생들을 보내 이 축제에 참여하라고 한 것 같다.

여기, 대구에서는 2시와 4시에 맞춰 악대를 보내달라고 일본인들이 요구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동안 악사들을 모으기가 불가능했으므로 우리는 거절해야만 했다.

칭다오에 있던 4명의 성 베네딕도회 수사 중 간호원인 한 명은 포로가 되지 않았으나, 3명은 일본에서 감금돼 있다고 한다.

12월 10일, 카닥스 신부가 남디시(Namdish)에서 편지와 중위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보냈다. 그는 중국 국경에서 복무하도록 파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12월 31일

신학교에서 성적 발표 후, 한 해를 마감하는 성체 강복을 했다. 올해는 신학교가 개교했고, 전쟁이 시작됐다. 이 해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권고의 말을 정당화시켜 준 해이기도 하다. ‘십자가가 발견되면 어디에서든 회개하여라.’


 
▲ 주교관(오른쪽)과 성 유스티노 신학교. 주교관은 1913년 12월,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1914년 10월 완공됐다.
 

 
▲ 성 유스티노 신학교 내 성당의 완공 당시 제대 모습.
 



가톨릭신문  2010-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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