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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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제열전] 16. 뼛속까지 진정한 사제요 목자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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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본당 주임시절인 1944년 세례식 후 새 영세자들과 함께 한 이광재 신부.
 

준비된 사제 `8품 신부`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왔다. 1935년 차부제품을 받기 전이었다. 어렸을 때 다친 손가락이 문제였다.
 광재가 9살 때였다. 낫으로 버드나무가지를 벗겨 버들피리를 만들려다 왼쪽 둘째 손가락이 덜렁거릴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다. 급하게 달려온 부모는 부목을 댄 후 칡덩굴로 칭칭 감아맸는데 다행히도 손가락이 붙고 상처가 아물었다. 하지만 자리를 잘못 잡아 마치 뱀 모양처럼 기형이 돼버렸는데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신학교 교수신부들은 회의를 열어 차부제품을 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마른 하늘에 날 벼락 같은 선고였다.
 얼마 후 손가락이 정상이 아니긴 하지만 제병을 만지고 성체를 들어올리는 데에 지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신부들은 다시 차부제품을 받도록 허락했다. 이광재 신부는 이듬해인 1936년 3월 28일 종현(명동)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박원영(프란치스코)ㆍ임종구(바오로)ㆍ김학용(시몬) 등 동기생들과 함께였다.
 이 신부 첫 임지는 당시 정규하 신부가 주임으로 있던 풍수원본당 보좌였다. 외모는 그다지 볼품 없었고 과묵한 성품이었지만 겸손하고 열성적인 젊은 사제는 3년 조금 넘는 풍수원 보좌 생활을 통해 착한 목자 사제상을 신자들에게 깊이 각인시켜 주었다.
 「순교자 이광재 신부 순교에 관한 고증록」에서 전하는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면,
 - 학비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학생을 위해 아무도 모르게 학비를 지불했고, 누가 알면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열심한 교우가 했다"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 추운 겨울날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을 때 어떤 거지가 성당 마당에서 벌벌 떨고 있는 것을 보고는 신고 있던 버선을 벗어 주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교우들에게는 "예수님이 언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실지 모른다"고 말했다.
 - 눈 내리던 어느날 동산에서 장작 패는 소리가 나서 올라가 보니 이 신부가 장작을 패고 있었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학당 난로에 땔 장작이었다.
 - 30~40리 떨어진 산골 공소에서 저녁 늦게 병자성사를 청하러 왔는데 늦었으니 다음날 가라는 주임신부 말에 영혼을 구하는 일을 늦출 수 없다며 길을 나섰고 돌아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나 기겁을 했으나 끝까지 정신을 잃지 않고 사제관으로 와 다음날 아침 미사 시간을 정확히 지켰다.
 - 농촌에서 봄철에 논을 갈 때에도 신자들이 미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새벽 3시에 미사를 드려주곤 했다.
 - 누가, 언제 고해성사를 청해도 즉시 응했다. 시골 신자들이라 시간 관념이 없어 아무 때나 가서 성사를 청했지만 언제나 한결같은 태도로 영혼 하나 하나를 정성껏 지도해 주었다.
 그뿐 아니었다. 이 신부는 틈만 있으면 성당 성체 앞에서 지냈다. 그래서 신자들 사이에서는 `보좌 신부님을 만나려면 성당이나 병자집이나 뒷동산 나무패는 곳에 가면 된다`는 얘기까지 돌았다.
 뼈저리게 가난을 체험한 사람들은 두 번 다시 그런 가난의 고통을 겪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린 시절 허기를 달고 지냈을 정도로 가난하게 자란 이 신부는 그 반대였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자신을 비우고 낮추신 그리스도를 닮고자 그는 가난을 온 몸으로 포용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난을 닮는 본보기를 발견했다. 가난을 `귀부인`이라고 부른 평화의 사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였다.
 1937년 9월 28일. 이광재 신부는 또다른 의미 있는 행보를 시작한다. 선배인 오기선 신부와 함께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재속프란치스코회(3회)에 입회한 것이다. 이 신부가 추운 겨울날 거지에게 버선을 벗어주고 옷을 벗어준 것도 사부인 프란치스코 성인을 더욱 본받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파도바의 안토니오를 수도명으로 삼은 이 신부는 이후 평생을 재속 프란치스코회원으로서 삼회 규칙을 충실히 지키며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범을 닮고자 노력했다. 그리스도를 가장 닮아 제2의 그리스도라 불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이광재 신부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한 것은 이런 프란치스코 정신의 발로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닮는 길이기에.
 1939년 7월 이 신부는 3년 간의 풍수원보좌 생활을 마치고 양양본당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한다. 당시 양양본당의 현안은 성당 이전과 신축이었다. 이 신부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양양읍 성내리 8 현재 자리에 붉은 벽돌조 슬레이트 지붕 성당과 사제관 부속 건물을 완공하고 1940년 2월 봉헌식을 가졌다.
 이 신부는 신축 공사로 바쁜 중에도 공소 순방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관할 구역 외에도 영서 지방인 인제 양구 화천 지역 공소들까지 순방하며 신자들을 돌보았다. 늘 걸어서 공소를 순방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한 신자가 나귀 한 마리를 선사했지만 이 신부는 먹이를 먹이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사양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말인 1944년 양양성당은 전쟁에 광분한 일제에게 빼앗기고 만다. 이 신부와 성당 식구들은 성당 곁에 붙어있는 조그만 방으로 쫓겨나 그곳에서 미사를 드렸다.
 마침내 1945년 8월 빼앗긴 조국을 다시 찾으면서 이 신부와 신자들은 성당도 되찾았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였다. 38선 이북에 위치한 양양성당과 이 신부는 북한 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의 감시 대상에 들었다. 소련군은 높은 곳에 있는 성당을 사용하고자 이 신부가 공소 순방을 나간 틈을 타 성당을 점유해 버렸다. 얼마 후 소련군은 물러났지만 다시 인민군이 들어와 성당은 물론 부속건물마저 접수했다. 이 신부는 한 적산가옥으로 쫓겨나 공산당 감시 속에 미사를 드리며 신자들을 돌봐야 했다.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북한교회는 공산당 탄압으로 차츰차츰 붕괴돼 갔다. 교회가 파괴되고 신자들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면서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끌려가 살해되기도 했다.
 양양성당은 38선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서 박해를 피해 남하하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쉽게 들를 수 있는 곳이었다. 이 신부는 공산당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이들을 안전하게 숨겨주었다가 본당 교우들을 통해 무사히 38선 이남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이 일에는 많은 위험과 어려움이 따랐지만 이 신부는 단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무사히 월남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나보다 훌륭한 성직자, 수도자들 하나라도 더 월남해 남한에서 하느님 영광을 한껏 드러내도록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 신부는 남아 있는 신자들을 찾아 돌보는 사제 본연의 일에 소홀하지 않았다. 당시 사목자들은 1년이면 절반은 공소 순방에 할애하곤 했는데 이 신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환자를 방문해 병자성사를 집전하고 임종을 지켜주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시한 이 신부였다.
 1949년 1월 15일 70살이 넘은 병약한 노모(김 수산나)가 마침내 숨을 거뒀다. 공소를



가톨릭평화신문  201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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