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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천주실의] (7) 하느님의 존귀한 바를 다 캐낼 수 없다

신 존재의 무한성은 인간 인식 뛰어넘어, 하느님 무한성 표현 위해 토마스의 부정신학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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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체험하는 하느님은 참으로 초월적이며 내재적이다. 이 양면성을 근거로 하느님을 창조주로 부른 이유는 세상 창조를 언급하기 위한 것이며, 세상 창조는 중세적 의미에서 존재의 최종 원인을 주장하기 위한 서술이었다. 사실 하느님의 유일성은 존재의 궁극적 원인으로 해설되기도 하지만, 신 존재 증명의 길이기도 했다. 마침내 천주(天主)의 신명(神名)이 하느님 존재의 유일성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기술된다. ‘오직 한분 천주만이 태초에 하늘과 땅과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때에 맞추어 주재하시고 생존케 하시며 편안케 하신다(獨有一天主始制作天地人物 而時主宰存安之)’

하느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만물의 처음이요 만물의 뿌리이다(天主則無始無終而爲萬物始焉 爲萬物根 焉). 그러므로 하느님이 없으면 만물은 존재할 수 없고(無天主則無物矣), 만물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생겨나지만 하느님은 (다른 무엇에서 비롯해) 생겨나지 않는다(物由天主生 天主無所由生也). 리치의 서술을 상기하면서 요한복음서의 말씀의 존재를 들어보라.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1-3)

시작도 끝도 없는 한 분 하느님의 무한성이 다시 논의의 요소가 된다. 동서남북(東西南北)과 상하(上下)로 경계 지을 수 없는 무한한 존재는 창조계의 제한적 성격 안에서 그 위대함의 전모를 드러낼 수 없다. 그래서 리치는 하느님의 무한성을 드러내기 위해 부정신학의 전개 이유를 제시한다. 하느님의 참 모습이나 특성을 드러내려면 ‘아니다’ 혹은 ‘없다’로써 말할 수밖에 없다. 창조계의 어떤 존재로도 신 존재의 성격을 궁극적으로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창조주이신 신이 ‘(무엇)이다’라고 말한다거나, ‘(무엇을)가지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사실과 더욱 멀어지기 때문이다(苟以‘是’以‘有’, 則愈遠矣). 만약 신을 창조계의 무엇에 비유한다거나 소유를 나타낸다면 그것은 은유나 상징에 불과한 표현일 뿐이다. 인간은 신 존재의 신비를 암시적으로 드러낼 수는 있으나, 자기의 인식 안에 그 내용을 담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논의는 토마스의 「신학대전」 첫 권을 보는 것만으로 리치가 얼마나 토마스 신학을 가까이 따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토마스는 신 존재의 무한성을 논하기 위해 신의 속성(屬性)을 철학적 이해를 전제로 제시하고 있다. 하느님의 존재 유무를 출발점으로, 그분의 단순성, 완전성, 선성(善性), 무한성, 내재성, 영원성, 단일성 등을 차례로 논의한다. 사실상 토마스의 논의는 신 존재의 불가해성(不可解性)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신 존재의 무한성은 인간의 인식 차원을 초월하는 까닭에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리치는 이런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그저 ‘하느님의 존귀한 바를 다 캐낼 수 없다’(不能窮其所爲尊貴也)고 단순명쾌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 존재의 궁극성을 말하기 위해 어떤 개념을 사용할 수 있을까?


박종구 신부(예수회·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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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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