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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천주실의] (9)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하느님은 창조 이후에도 창조계와 무관하지 않고 당신의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 참여하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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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창조주 하느님을 고백하는 신앙에 이미 예고돼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자신의 모습과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다.(창세 1,27) 피조의 존재는 단순히 창조한 뒤 무가치하게 버려질 존재는 아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4,16)란 명제는 창조계를 위하시는 하느님 존재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의 이런 의미는 한자문화권에서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리치의 제시는 문화와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변화를 겪으면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중국문화의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닦는 배움’(修己之學)을 통해 ‘공을 이룬다’(修己功成)고 생각한다. 오랜 세월 한자문화권에서는 이러한 사람을 불러 성현군자(聖賢君子)라고 일컬어 왔다. ‘덕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행복’(成德乃眞福祿)이며 인생의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가 한자문화권에서는 인간의 완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가는 길은 목표가 있고, 비로소 목표에 도달해서야 멈추게 된다. 우리들이 자신을 닦아 나가는 길은 어디에서 끝날 것인가?(吾修己之道 將奚所至歟).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먼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 같은 실존적인 질문에 대해 리치는 서사(西士)와 중사(中士)의 문답을 통해 그 답의 일부를 은연중에 내비친다.

인간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고,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다. ‘안으로는 정신적 영혼을 받고 태어났고, 밖으로는 사물의 이치를 볼 수 있다’(內稟神靈 外覩物理). 일이 나타난 단서를 보고 미루어 그 근원을 알 수 있고, 결과를 보고 그 원인을 추리해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바른 도리를 받아서 사물을 궁구하기 때문에’(人稟義理以窮事物) 이치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군자는 이치를 가장 주요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치의 체(體)와 용(用)은 너무나 넓어서 성현이라도 다 알 수 없다(理之體用廣甚 雖聖賢亦有所不知焉).

우리는 중국선비의 말을 통해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없고, 밖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체용(體用)의 논리를 듣는다. 인간의 지와 무지가 도(道)의 체용 앞에서 멈추고 만다. 만약 도(道)가 인간이 추구하는 최후의 존재와 현상의 근거라면, 그리고 이런 가정이 성립된다면, 서양선비의 말을 통해 이런 추구가 단번에 흔들리게 됨을 알게 된다. 데우스(Deus, 하느님의 라틴어 표기), 곧 천주(天主)의 존재는 이보다 더 자명한 사실이 없다고 서양선비는 주장하는 것이다. 중국선비의 논리가 아래에서 또는 밑에서 출발해 꼭대기에 도달하는 논리라면, 리치의 논리는 위에서 아래로 또는 높은 곳에서 밑으로 치닫는 것이다.

리치의 설명에 따르면, 창조계의 피조물들은 창조의 목적과 질서에 따라서, 그리고 창조자의 섬세하고 신비한 배려에 근거해 존재한다. 창조주는 피조물들이 자기 목적을 실현하도록 하는 힘이며 근거이다. 리치가 하느님이 유일하신 분이며 창조주이심을 논증하는 과정은 곧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해설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창조 후에 창조계와 무관한 관계를 유지하신 분(理神論·Deism)이 아니라, 하느님 당신의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의 각 개별 존재의 삶에 참여하는 존재인 것이다.


박종구 신부 (예수회·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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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0-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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