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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천주실의] (12) 많은 어려움 남아있는 그리스도교 신학 논의

심오한 사상적 이해보다 복음전파 가능성에 주력, 그리스도교 고유의 신학 마지막 장에 간단히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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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도가와 불가의 주장에 대한 리치의 이해는 극히 제한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리치는 동양사상의 심오한 이해에 관심을 보였던 것이 아닌,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선교적 열정이 컸다. 사실 리치가 무(無)와 공(空)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도가와 불가를 이해했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유가의 교리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도가와 불가를 언급했다고 보는 게 더 나은 표현이다. 유가의 위상을 높이고 도가와 불가를 격하시킴으로써 본격적으로 유가와 대화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사(中士)의 질문 속에는 동양식 사유의 특징을 드러내며 도(道)의 의의를 드러낸다. 그리스도교의 창조개념이 미비한 동양식 사유에서 도(道) 혹은 이치(理致)는 인간의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현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처음에 없었다가 나중에 있게 되는 게(物者先無而後有) 사물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중국에서는 그걸 일컬어서 도(道)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에서 창조와 창조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 설명은 아주 단순할 수 있지만, 신학적 의의를 드러내는 단계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피조물을 ‘시작이 있는 존재’(有始之物)라고 말한다면, 창조주는 ‘시작이 없는 존재(無始之物)’라고 할 수 있다. 즉 시작이 없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없기 때문에 창조주 ‘이전의 없음’(先無)은 생각할 수 없다(無始者 無始不有 何時先無焉).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고백하는 신앙체계임을 말해야만 한다. 리치는 아마도 그리스도교 고유의 신앙을 논하기에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현대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도 4~5세기 고대교회(古代敎會)에서 격렬한 논쟁을 거쳐 정립된 신앙교의를 이해하기가 그렇게 용이하지 않다. 리치도 마지막 장에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어떻게 세상에 왔는지 간단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고대교회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 신앙이 신학적 정식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던 시절에도 하느님 존재를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앞에서 들은 바와 같이 가능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을 이해하기 위해 존재론적 사유에 익숙했던 헬레니즘은 유일신 신앙에 늘 문제가 되는 장애물이 되기도 했다. 하느님 존재의 유일성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이해하고 고백하기엔 너무 힘들었던 주제였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신의 속성을 유일하신 하느님 아버지에게만 돌리고, 그리스도의 피조성을 강력히 주장한 이론들이 등장했다. 그 중 전형적인 주장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긍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분은 ‘시작이 있는 존재’(有始之物)라고 말했던 것이다. 인간의 눈에 시작이 있는 존재인 그리스도(한 여인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존재, 공관복음서)가 영원 전부터 존재했고, 창조계가 그분 안에서 존재하기 시작했다(요한 1,1~3)는 주장은 일견 모순이었던 것이다.


박종구 신부 (예수회·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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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0-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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