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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천주실의] (14) 자연철학에 기초한 ‘이(理)·기(氣)’ 이해

존재 차원 개념 ‘이(理)’, 사물의 차원에서 다뤄, 이기(理氣)의 동양 사유, 자연철학적 이해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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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의 생각에 ‘이(理)’는 경험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인 개념일 뿐이다. 이(理)는 이치(理致)이며 관념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리치는 이렇게 설명한다.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수레를 예로 들어, 수레를 만드는 사람의 마음속에 이(理)가 있다고 해도 이(理) 자체가 수레를 만들지는 못한다. 이(理)는 수레를 완성하기 위해 나무와 같은 재료나 도구와 같은 질료(이를 일컬어 질료인)와 기술자의 노동(노동인)이 필요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이(理)는 하느님 존재와 같이 창조주도 아니고, 만물의 최종 원인이나 근거가 되지 못한다. 또한 태극사상에 따르면, 이(理)는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을 낳고 오행은 천지만물을 낳는다. 리치가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선 동양의 사유세계를 심각하게 통찰했을 것이다. 아마도 언어와 사유의 틀이 다른 두 세계가 부드럽게 만나기 위해 파괴적 충격을 피할 방법을 찾고자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도 그러하지만, 이(理)와 기(氣)의 세계로 표현되는 동양적 사유세계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기초해서 분석한다는 것은 그렇게 분명한 일이 아니었다.

리치가 “이(理)는 이성능력과 지성능력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때, 리치는 서양식 이성과 지성의 발휘를 전제하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에게 있는 이 능력들은 이 능력들을 초월하는 신(神) 존재를 전제하고, 이 토대 위에서 창조계의 질서를 생각하고 있다. 이(理)를 존재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면, 리치는 실존적 차원에서 이(理)를 다루고 있었다. 존재의 차원에서 언급되어야 할 이(理)를 현실세계의 차원에서 언급하는 것은 사실 의미부여하기가 어렵다. 이(理)는 자연세계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선택된 표현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자연세계의 배후를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개념인 것이다.

그리스 철학의 커다란 갈래를 이룬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철학적)범주론에 기초하고 있다. 범주론은 긴 역사적 발전과정을 거쳐 왔지만 근본적으로 ‘사물의 일반적 분류’라는 뜻을 함축하고, 이(理)에서 여러 방법적 인식론이 제시되었다. 인식론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적 방법이지만, 인간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 그리고 이 세계를 존재하게 한 최종근거 내지 초월적 존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는 사유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만큼 그 표현도 다르다. 생각하는 방식이 다른 두 세계가 전개하는 논리는 만나는 것 자체를 꺼리기도 한다. ‘이(理)가 움직여서 양(陽)을 낳았다(理動而生陽)’를 근거로 양(陽)을 이성능력이나 지성능력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빗나간 논리가 될 것이다. 양(陽)을 사물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음양(陰陽)은 사물의 실존 차원에서 출발한 개념이 아니라, 우주 만물의 현상을 이원론적 대립 구조에서 파악하려는 언어인 것이다. 이런 개념어가 리치에게 자연세상을 이해하는 언어로 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익숙한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경험세계를 이해하는 언어가 경험세계를 포함하되 그것을 초월하는 세계를 쉽게 다룰 수는 없다.


박종구 신부(예수회·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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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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