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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천주실의] (15) 추상적 관념으로 이해한 태극(太極) 개념

자연철학적 사유에 입각, 태극을 ‘속성’으로 간주, 태극을 근원으로 보는 동양 사상과 차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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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리치와 중국 선비가 서로 오해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간극을 느낀다면 두 개의 사유가 제대로 만나지 못한 이유가 해소되어야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태극(太極)이 하느님이요 천지 만물의 시조라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 신(神) 존재의 고대 중국식 이름이거나 다른 관용어로 매김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시기엔 인문학적 사유가 극도로 진행된 성리학의 사유에서 종교적 요소는 많이 탈색해 있었다. 게다가 그리스도교적 신(神)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당연히 최고의 존재를 설명하는 생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았던 세상에서 이 질문은 다른 추상적 답변을 가져올 뿐이다.

주돈이(周敦 ·1017~1073)의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을 해석하는 논의조차 중국학자들의 일치는 거의 불가능했다.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을 동일 명칭으로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태극의 본원을 무극으로 이해할 것인지 일치된 견해를 찾을 수 없다. 더구나 사상적 논의를 단순히 자연철학에 근거하여 이해하고자 할 때 얼마나 커다란 오해를 가져올 것인가? 리치에게 태극(太極)은 그저 추상적 관념 혹은 허망한 생각(虛象)이며 실제적 내용이 없고 믿을 만한 이치(理)가 아니었다. 어찌하여 태극(太極)은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는 것일까?

다시 한 번 사물의 범주를 실체(自立者·substantia)와 속성(依賴者·accidentia)으로 이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생각해 보자. 범주론에 따르면, 실체는 고정적이며 자립적이고 속성은 가변적이며 임시적이다. 따라서 실체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은 다른 개체의 도움 없이 실재하는 것으로 1차적이며, 속성은 실체에 의탁하여 성질을 밝혀주기 때문에 2차적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중국학자들이 이(理)를 마음과 동일시하거나(陸九淵·1139~1192, 王守仁·1472~1528) 사물 속에 내재한다는 사실(程 1033~1107, 朱熹·1130~1200)은 이(理)의 속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사물이 있고 난 뒤에 이(理)의 존재를 말하게 된 것이니, 자연철학적 사유에 익숙한 리치에게 이(理)는 속성에 불과할 뿐이다. 존재에 있어 1차적인 것을 앞서지 못하는 2차적인 이(理)는 실체가 될 수 없는 것이라고 리치는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理)가 존재하지 않으면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無其理則無其物).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理)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이(理)가 만물의 근원(理爲物之原也)이라고 주장했다면(周敦頣), 리치가 이해하는 기반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적 해석은 유효하지 못한 결과를 낳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적 이해는 이(理)를 관념에 머물게 하고 자연사물의 실체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존재물의 생성에 대해 동양식 해설은 먼저 형이상학적 개념에서 출발하여 자연사물에 이른다. 말하자면 이(理)가 먼저 음양과 오행을 낳고 연후에 천지만물을 조화 생성시킨다(理者先生陰陽五行, 然後化生天地萬物). 그렇다면 자연세계의 창조주를 염두에 둔 그리스도교적 창조사상과 이(理)를 천지만물의 발생근원으로 보는 생각과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박종구 신부(예수회·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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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0-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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