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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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3> 순교자 이광재 신부

사부 성 프란치스코 길 따라 애덕 실천한 착한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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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신고 있던 버선이라도 벗어줬다.


 
▲ 일제 강점과 해방, 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를 살다가 전쟁 중에 순교한 이광재 신부. 사진출처=「주님 제가 갈게요」(도서출판 대희 펴냄)
 

 
▲ 이광재(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신부가 1937년 3월 풍수원본당 회장 피정을 마친 뒤 본당 주임이던 정규하 신부, 본당 및 공소 회장단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출처=「주님 제가 갈게요」(도서출판 대희 펴냄)
 

 
▲ 이광재(뒷줄) 신부가 1942년 자신이 보좌로 있던 풍수원본당에 찾아왔다가 본당 신자들과 함께했다.
사진출처=「주님 제가 갈게요」(도서출판 대희 펴냄)
 


   8, 15, 41. 세 숫자는 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국가형제회 사상 두 번째 사제 회원으로 기록되는 이광재(티모테오, 1909~50) 신부의 삶을 압축해 드러낸다. `8품 신부`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열심했던 신학교 생활,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범을 따라 산 착한 목자로서 15년, 41살을 일기로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증거한 순교자로서 삶이었다.


   #깊은 산골 소년, 신학생 되다

   이 신부는 1909년생이다. 경술국치에 1년여 앞서 강원도 이천군 낙양면 내락리(북한 행정구역상 북강원도 판교군 지상리) 냉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만현(가브리엘)씨, 어머니 김 수산나씨 사이 2남 1녀 중 차남이다. 이천에서도 가장 깊은 산골 동네 교우촌에서 태어난 소년 이광재는 특히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학교에 가기 전 그의 모습을 가장 잘 기억하는 이는 그의 형 이광익(필립보)과 당시 신학생이던 노기남 대주교다. 노 대주교는 방학 때면 고향에 돌아가 소년 이광재와 훗날 `예수 성심의 사도`로 불리게 되는 이재현(요셉, 1909~50?) 신부를 만나 신앙을 이끌었다. 이들이 신학교에 들어간 것도 노 대주교 영향이다.

 용산 예수성심소신학교에 입학한 신학생 이광재는 소신학교 시절부터 열심을 보여 모범생이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하도 열심이어서 `8품 신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수문품과 강경품(독서직), 구마품, 시종품(시종직), 차부제품, 부제품, 사제품 등 7품(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독서직과 시종직, 부제품과 사제품만 남음)을 넘어서는 인격과 신앙적 열심을 갖췄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재미있는 별명이다.

 그렇지만, 방학 때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는 이튿날부터 밭을 매느라 손과 발, 옷에 온통 풀물이 들 정도로 억척같이 일을 한 착한 아들이다. 부제품을 받을 당시엔 어렸을 적 낫에 다친 왼쪽 검지 탓에 사제가 될 자격이 있는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미사전례 집전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교수신부들 판정을 받고 부제품을 받는다.

 마침내 신학과정을 마친 이 부제는 1936년 3월 28일 종현(현 명동)성당에서 당시 서울대목구장 라리보(원형근)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 `착한 목자`로서 그리스도께 충실한 삶을 시작한다.


   #새 신부, 착한 목자로 발을 내딛다

 새 신부의 첫 부임지는 강원도 횡성 풍수원본당이다. 1936년 4월, 풍수원본당에 부임한 이 신부는 재속 프란치스코회 사제답게 애덕과 봉사,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돌봄을 몸으로 실천하는 젊은 사제로 산다.

 1937년 9월 말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으로 재속 프란치스코회(프란치스코 3회)에 입회한 것은 사제로서 그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다만 지방에서 사목하며 살아야 했기에 그는 `단독회원`으로 활동했다. 회원이 된 이후 줄곧 수도복과 띠를 착용하고 홀로 규칙을 지키며 `작은 자`로서 산 이 신부는 고해성사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은 서울에 들렀는데 그때마다 같은 재속 프란치스코회 사제인 오기선 신부에게 「성화」지를 비롯해 여러 자료를 가져가 보곤 했다. 또 각종 일본어 자료를 번역해 재속 프란치스코회원들에게 제공함으로써 많은 영적 도움을 줬다.

 3년간 풍수원본당에서 보좌로 산 이 신부의 애덕 실천은 사부 성 프란치스코가 걸어간 길을 따르는 삶이었다. 그래선지 지금까지도 이 신부의 사목 행적이 본당에서 전해져올 정도다.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아무도 모르게 학비를 대준 것은 물론 추위에 떠는 거지를 보면 그냥 지나치



가톨릭평화신문  2011-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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