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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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권 몬시뇰에게 듣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상)

“세상 속 주님의 보물 찾는 길 밝혀주는 등불”/ 급변하는 세상에 발맞춘 교회의 역동적 움직임/ 새로운 교회개념 제시한 「교회헌장」 가장 중요/ 무수한 논쟁·치열한 모색 끝 공의회 문헌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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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권 몬시뇰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급변하는 현대 세계 안에서 교회 쇄신을 목표로 열린 위대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교회가 지켜온 믿음의 성을 무너뜨리는 이단에 대해 대응하거나 교리에 대한 중요한 결정을 하기 위해 열린 이전의 공의회들과는 달리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 쇄신을 겨냥해 교회의 모든 영역에서 이른바 ‘아죠르나멘토’(aggiornamento, 교회의 현대화)를 모색한 공의회였다.

1962년 10월 11일 개회 당시 의원자격자 3043명 가운데 2540명의 교부들을 비롯해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의 옵서버 약 60명이 참가해 교회 역사상 최대 규모로 열린 공의회는 급변하는 현대 세계의 조류에 발맞춰, 교회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 역동적인 힘은 개막 50주년을 맞는 오늘까지도 교회 곳곳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역사적 사건을 지켜본 신학자의 눈을 통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역동적인 순간들을 되돌아본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사제 생활에 있어 ‘등불’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심어놓은 보물을 찾아가는 길을 밝혀주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개막을 알린 1962년 당시, 이탈리아에서 멀지 않은 스위스 프리부르그(fribourg)대학교에서 유학하며 교회론을 공부하고 있던 정하권 몬시뇰(마산교구 원로사제·84)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자신에게 공의회는 등불과도 같은 존재라고 정의했다.

사제로 살아가며 갈수록 쌓여만 가는 목마름 끝에 택한 유학길에서 교회론에 발을 디딘 것은 그에게는 묘한 부르심과도 같은 것이었다. “당시 신학교 과정에는 교회론이란 과목이 없었어요. 죽을 때까지 교회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사제로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겁이 났습니다.”

이 선택으로 정 몬시뇰은 한국교회에서 교회론 제1호 전공자가 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반포한 문헌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히는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Lumen Gentium·교회헌장)이 바로 정 몬시뇰이 생애 대부분을 천착해온 교회론을 담고 있는 것이기에 공의회가 열리던 당시 그의 눈길도 공의회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교회 역사상 획기적인 전환점이며 미래를 위한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받고 있는 바티칸공의회의 성과가 바로 이 「교회헌장」에 기인한 바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헌장은 하느님의 백성과 교회의 관계를 명확히 밝히고 교회의 정의를 새롭게 함으로써 교회의 현대화라는 공의회의 기본 테마이자 명제를 구현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공의회는 새로운 교회론을 탄생시키고 그리스도 신비체에 대한 이해를 더해줌으로써 오늘에 이르기까지 웅장한 생명력을 교회에 가져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의회 개막 초기에만 하더라도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바티칸으로 오신 서정길 대주교님이 저를 찾아오셔서 공의회에서 다룰 의안집을 보여주시고 의견을 물으셨는데, 읽고 난 소감은 한마디로 이걸 하려고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서 공의회를 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1962년 10월 11일 개회 당시 2540명의 교부들을 비롯해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의 옵서버 약 60명이 참가해 교회 역사상 최대 규모로 열린 공의회로, 급변하는 현대 세계의 조류에 발맞춰 교회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때 정 몬시뇰의 대답은 “통과 안 됩니다”였다. 그의 눈에는 교회 스스로가 자신의 신원에 대해 연구해 발표하려는 목적을 지닌 교회론에 대한 의안이 아무 의미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의 반응에 서 대주교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실제 그가 예견이나 한 것처럼 공의회에서는 교회헌장 의안을 두고 교부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고 교회 안을 들여다보고자 한 의안집은 결국 폐기되고 말았다.

공의회가 열리는 동안 공부를 계속 이어가면서도 정 몬시뇰의 눈길은 잠시도 바티칸 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천착하고 있는 교회론의 중요한 소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의회 소식을 전하는 신문이나 잡지를 비롯해 교부들의 생각을 접할 수 있는 서적이라면 거의 빼놓지 않고 구해서 탐독했다. 그래도 목마름이 사그라지지 않자 몇 차례나 공의회가 열리는 로마를 찾기도 했다. 공의회의 분위기를 보고 구경하는 수준이었지만 갓 서른을 넘긴 사제의 삶에는 당시로서는 인식하지 못한 짙은 화인이 새겨졌다.

“공의회에는 교부들만 참석할 수 있었지만, 교부들을 제외한 일반 사제들도 각 언어권별로 이뤄지는 일반적인 토론 과정은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결정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한마디로 굉장히 시끄러웠다고 기억됩니다.”

같은 언어를 이해하는 주교들이 모인 가운데 이뤄지는 토론은 주교들이 동행한 전문가들이나 신학자들이 내놓는 이야기를 듣고 의견을 교환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정 몬시뇰이 참관한 프랑스어권 교부들의 토론 과정도 마찬가지여서 때에 따라서는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교부들 가운데 한 분이셨던 쉬넨스(L. J. Suenens) 추기경이 밝힌 대로 ‘내부를 향한 교회(ecclesia ad intra)’를 다룬 교회헌장을 비롯한 ‘외부를 향한 교회(ecclesia ad extra)’를 담은 사목헌장 등 16개 공의회 문헌은 결국 교회가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의회 개막 당시 58살의 나이로 공의회에 참석하고 있던 벨기에 브뤼셀 말린대교구장 쉬넨스 추기경에 대한 기억이 유독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은 그가 공의회에 적지 않은 신학적 기초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쉬넨스 추기경은 교회



가톨릭신문  201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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