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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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전통의 재발견] 로마제국은 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나?

2000년 복음화 역사에 흐르는 숭고한 순교의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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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들이 우리를 타작(살해)할 때마다 우리는 즉시 더 많은 숫자로 불어난다. 그리스도인의 피는 신앙의 씨앗이다." (197년 최초의 신학자 테르툴리아노가 로마 지방 행정관에게 보낸 「호교론」 50,13)


 
▲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에 있는 성 체칠리아 주검 석상.
최후의 순간까지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한 손가락 모양과 목에 난 상처 자국이 눈길을 끈다.
 
 
   로마 칼리스투스 카타콤바(그리스도인 지하 공동묘지)에서 한 여인의 주검과 마주쳤다.

 어두운 땅속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2000년 가까이 `잠들어 있는` 성 체칠리아 주검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백옥같이 흰 목덜미에 예리한 칼날이 스쳐 지나간 흔적이 선명하다.

 #성 체칠리아의 처절한 증언

 체칠리아는 로마 원로원 가문 출신이다. 부귀영화가 약속된 그의 장밋빛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동정을 서약했다.

 체칠리아는 신전 제사를 거부한 신성 모독죄로 체포돼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차라리 죽음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겠다"며 순교의 길을 택했다. 행정관 알마치우스는 욕탕에 가둬 증기로 질식시켜 죽이는 형벌을 내렸다. 하지만 체칠리아가 욕탕에서 24시간이 지나도 죽지 않자 밖으로 끌어내 목을 벴다.

 체칠리아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자신이 굳게 믿는 삼위일체 신앙을 드러냈다고 전해진다. 오른쪽 손가락 세 개를 펴고, 왼손 검지를 뻗어 한 분이신 구세주를 나타낸 주검 석상이 그 처절했던 순간을 전해주고 있다.

 고대 그리스ㆍ로마 사람들은 무덤을 네크로폴리(Necropoli), 즉 죽은 자들의 장소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체메테리움(Coeme terium)이라 했다. 천상 부활의 영광을 기다리며 `잠자고 있는(쉬고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발원해 로마로 건너온 그리스도교는 무덤을 지칭하는 용어에서 보듯이 생사관을 비롯한 여러 이념이 로마제국의 그것과 달랐다. 로마뿐만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가 새로운 복음을 선포할 때부터 시작해 유럽 정신문명의 기반을 이루고, 아메리카와 아시아로 전파되는 동안 거의 모든 지역에서 토착 정신문명과 차이를 보였다.

 그리스도교는 그 차이를 극복하고 오늘날 세계 종교로 우뚝 섰지만, 그 과정에서 무수히 박해를 받고 피를 흘렸다. 2000년 복음화 역사는 `박해와 순교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역사는 성 체칠리아가 순교한 시기인 2∼3세기 로마제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반감과 충격

 그럼 `패자도 동화시킨다`는 관용 정책으로 대제국을 건설한 로마는 왜 그리스도인들을 모질게 박해했을까.

 고전 명화 `쿼바디스`의 소재가 된 폭군 네로 황제 박해는 순전히 정치적 이유에서였다. 네로는 64년 로마 대화재 직후 민심이 폭발할 지경에 이르자, 유다교의 한 분파쯤으로 여겨지던 힘없는 그리스도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로마 시민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불온하고 가당찮은 미신 추종자들이라고 생각했다.(영화에서 박해를 피해 로마를 탈출하던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도망쳐 나온 로마로 향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마주치자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하고 묻는다. 예수께서 "너 대신 십자가를 지러 간다"고 말하자 베드로는 다시 돌아가 순교의 십자가를 진다.)

 하지만 박해 속에서도 그리스도인 숫자는 계속 불어났다. 처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기존 전통과 사뭇 다른 영적 세계와 도덕적 지침을 제시하는 신흥종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시민 대중과 위정자들 눈에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존재였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며 제의에 참석하지도 않고, 형상 없는 무엇(하느님)만을 숭배하는 반국가적 무신론자로 비춰졌다. 로마는 신전을 차려놓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까지 열렬히 숭배하는 다신교 사회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육(성찬전례)을 먹고, 근친상간(형제자매라 부르며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것)을 한다는 괴소문도 퍼졌다.

 역사학자들은 200년께까지는 산발적 박해였고, 250년 데키우스 황제에 이르러 대대적 박해가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황제는 고트족이 침입하고 자연재해가 빈발하는 등 `신들의 평화`(Pax Deorum)가 깨지는 징후가 나타나자 그 평화를 복원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희생제물로 삼았다.

 이때 로마 시민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참수형을 당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굶주린 맹수 먹이로 원형경기장에 내던져졌다. 원형경기장에서 환호하던 시민들 중에는 현세의 것을 하찮게 여기고, 웃으면서 최후를 맞이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충격을 받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 로마 원형경기장 바닥에는 그리스도인들이 흘린 순교의 피가 배어 있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순교 역사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피를 흘리면 흘릴수록 그리스도 신앙은 제국을 이끌어가는 주류사회로 더 깊고, 빠르게 스며들었다. 결국 황제들은 그리스도교는 박해로 막을 수 있는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가혹한 박해로 이 종교를 근절하느냐, 아니면 수용하느냐, 이 갈림길에서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공인된 종교로 선포했다. 그들이 300여년 전 제국 변방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라는 젊은이에게서 발원한 종교를 제국의 종교로 받아들인 것이다. 극적



가톨릭평화신문  2012-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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