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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영성과 전통의 재발견] 중세 가톨릭, "암흑기" 아니라 "황금기" 이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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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시대 수도원은 서양 정신문명을 키워낸 어머니 뱃속 태반 같은 곳이다.
스위스에 있는 성베네딕도회 아인지델른수도원(9C 설립) 도서관에 들어선 순간, 인류의 지식과 정신을 축적해 놓은 장서 규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인지델른(스위스)=김원철 기자
 
 
 "우리는 중세사회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차라리 아는 것이 전혀 없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중세사학자 아베 긴야(1935∼2006)

  맞는 말이다. 현대에 와서 중세에 대한 재평가가 제법 이뤄졌는데도, 사람들은 중세라고 하면 으레 `암흑기`라는 단어를 갖다 붙인다. 인간 가치가 상실되고, 그리스도교에 의해 이성과 사고가 억압된 시대라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 시각에서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서양 중세는 로마제국 멸망을 불러온 4, 5세기 게르만족 이동부터 14, 15세기 르네상스 때까지 약 1000년 기간을 말한다. 인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부르짖는 문예부흥운동(르네상스)의 정당성을 드러내기 위해 중세 1000년 문명을 배척했다. 고대 그리스ㆍ로마시대는 인간성이 존중된 시대였기에, 그 시대 고전을 비롯한 문화를 재생해 유럽 문명에 생기를 불어넣자는 게 르네상스다.

 하지만 그들도 시대정신의 변혁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잘못을 저질렀다. 옛것을 필요 없는 것인 양 몽땅 털어내고 새로 시작하려는 어리석음 말이다. 600년 고도(古都) 서울에 옛 건축물은 고사하고 근현대가 공존하는 풍광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도시 현실을 생각하면 그들 잘못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중세에 대한 왜곡이 심한 이유

 중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특히 한국에서 더 심하다. 그 이유는 16세기 종교분열 이후 프로테스탄트들에 의해 더한층 굳어진 왜곡과 편견이 미국을 통해 그대로 유입됐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 사회와 학계에는 19세기 유럽 이민자들이 대거 밀려들 때 노골적으로 표출된 반가톨릭 정서가 여전히 존재한다.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의 저자 로널드 L. 넘버스는 "반가톨릭주의는 미국 역사에 가장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편견이다. 이런 편견이 강해져 가톨릭과 과학에 대한 통념(적대적 관계)으로 굳어졌다"고 말한다.

 알다시피 역사학을 비롯해 대부분의 서양 학문은 유학파들에 의해 미국의 것이 그대로 국내에 이식됐다. 개신교도 미국에서 들어왔다. 중세에 대한 한국사회 인식이 지극히 프로테스탄트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런 탓에 한국교회사연구소장 김성태 신부를 비롯한 가톨릭 사학자들이 10여년 전 중세 그리스도교 역사를 편파적으로 기술한 중고교 세계사 교과서 수정을 위해 애썼지만 아직 눈에 띄는 개선이 없다.

 아무튼, 중세를 덮은 `검은 천`을 몇 겹이나마 벗겨보자. 가톨릭이 중세의 정신적 지주였고, 학문ㆍ사상ㆍ문화의 중심축이었기에 중세 역사는 가톨릭 역사라고 불러도 괜찮다.

 인문주의자들이 "고대로 돌아가자"고 외치며 다시 들여다본 그리스ㆍ로마 고전은 1000년 동안 누가 보존하고, 연구했는가. 바로 수도원의 도서관과 수사들이었다. 수사들은 성경과 신학서적 외에 고대문화의 계승자라는 사명감을 갖고 고대 작품들을 필사하고, 보존했다.

 "(11세기 몬테카시노수도원에서) 한꺼번에 많은 글이 복원되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런 글들은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 우리는 훗날 이 수도원에게 타키투스의 「연대기」와 「역사」, 아풀레이우스의 「황금 당나귀」, 세네카의 「대화편」 (…) 그 외 필사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유베날리스의 여섯 번째 풍자시 등을 보존한 것을 고마워할 것이다."(「가톨릭교회는 어떻게 서양문명을 세웠나」 61쪽, 토머스 E. 우즈 주니어 저)

 성베네딕도회 몬테카시노수도원 수도자들은 인문주의자들보다 400여 년이나 앞서 `라틴문학 역사상 가장 극적인 사건`이라 불리는 문예부흥을 이뤄냈다.
 476년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족은 기록문화와 정치조직이 없는 야만족이었다. 교회가 그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교화시키지 않았더라면 살육과 파괴의 혼란 속에서 라틴고전이 몇 권이나 남아났을지 의문이다. 로마 멸망 후 프랑크족(프랑스), 서고트족(스페인), 앵글로색슨족(영국) 등 이민족들의 정신적 영도자 역할을 하며 문명을 재건한 게 가톨릭교회다.

 #교회, 과학과 학문 발전의 산실

 특히 성베네딕도회 수사들은 페스트의 진원지라는 속설 때문에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늪지를 농토로 개간하고 농사기술을 보급했다. `손으로 하는 노동`을 중시한 베네딕도회 수사들이야말로 서양 농업과 공업의 아버지이다.
 로널드 L. 넘버스가 "과학혁명의 자양분이 마련된 시기는 11∼13세기 중세 전성기"라고 말했듯이 교회가 천문ㆍ수학ㆍ물리ㆍ의학ㆍ지질ㆍ기계 등 과학 발전에 기여한 업적은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다. 회화ㆍ조각ㆍ건축 등 문화예술의 산실 역할을 한 것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런 실용과학 분야의 기여는 부차적이다. 학문과 사상의 발전 측면에서 볼 때 중세교회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대학교육 발상지는 교구와 수도원 부속학교들이다. 교회는 성직자들을 파견해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지식인들을 양성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이탈리아 사래르노대학과 보로그노대학, 프랑스 파리대학, 영국 옥스퍼드대학 등이 모두 12세기 후반 가톨릭 품에서 형태를 갖춘 대학들이다.

   그렇다고 이 대학들에서 신학만 가르친 게 아니다. 큰 대학에서는 시민법, 자연철학, 의학과 함께 7개 교양과목을 가르쳤다. 역사학자 로리 달리는 "교회는 유럽에서 지식보존과 양성에 끊임없이 관심을 보여주었던 유일한 기관"이라고 말한다.

 또 교회의 자선활동은 세상을 바꿨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활발했다. 로마시대에도 자선활동은 있었다. 그러나 목욕탕이나 연희장 등을 지을 때 부자들이 돈을 희사하고, 시민들이 답례로 건물에 이름을 새겨주는 기부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돕는 자선활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나온 `독창적` 행위였다. 20세기 경제사상사 사이먼 패튼은 이렇게 말한다.

 "교회는 노동자들에게 먹을 것과 쉼터를, 불행한 사람에게는 자선을, 병과 기근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는 위안을 제공했다. 이러한 것은 중세에 매우 흔한 일이었다. 우리가 병원과 진료소, 수사들의 하사기금, 그리고 수녀들의 자아희생을 헤아려보면 당시 불행한 사람들이 적어도 현재의 그런 사람들만큼 잘 대접받았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쇄신`은 교회의 또 다른



가톨릭평화신문  201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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