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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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는 진행 중… 한국교회와 새로운 복음화] (5) 전례헌장 해설 (상)

전례에서 시작됐고, 전례 통해 계속되는 교회 개혁/ 공의회 이전부터 진행돼온 전례운동 힘입어/ 신자들의 이해·참여 어려웠던 기존 전례 탈피/ 전례, 단순 예식 아닌 ‘그리스도 사제직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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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화(Aggiornamento)’라는 목적으로 시작한 교회 개혁은 전례에서 시작됐고 또한 전례로 계속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례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절대적인 하나의 전통이 있는 반면에 시대와 지역, 민족에 따라 변화해야 하는 부분들로 인한 다양한 전통들도 있기 때문이다.

현시대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또한 교회가 지닌 선교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보다 적합한 방법을 찾아 나선 교회의 모습을 드러낸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는 성령의 감도하심에 의해 시작됐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큰 특징은 시대의 요구에 겨우 맞추어 따라가는 정도에서 그쳤던 과거의 공의회와 달리 시대의 흐름을 면밀히 관찰, 분석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는 점이다. 아울러 그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는 깊은 영적인 의도가 있었으며, 시대의 다양한 요구에 따라 의제 토의도 교회생활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오랫동안 갈라졌던 다른 형제 그리스도교와 함께 토의하는 교회일치의 의지가 무엇보다도 두드러졌다.

그런데 이런 노력과 의지, 진행과 결과는 어느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보여지는 것으로는 요한 23세의 강력한 개혁 의지의 표명이 중요했지만 그전부터 교회에서는 전례를 중심으로 교회 전반을 쇄신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번 호에는 전례개혁의 태동과 공의회의 결과인 전례헌장의 특징들을, 그리고 다음 호에는 전례헌장의 구조와 내용 그리고 전례개혁의 구체적인 결실과 진행상황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전례개혁의 태동-전례운동

우리는 보통 물이 끓는 온도를 보통 100℃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100℃가 되기 위해서는 그전부터 열이 있었기에 끓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잘 생각하지 않는다. 전례개혁도 마찬가지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헌장’이 나오기까지는 그전에 많은 노력과 시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처음부터 교황청에서부터 움직인 것이 아니라 사목현장에서부터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그것을 연구하고 시도하는 수도원들과 연구단체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이었기에 전례개혁이 필요했을까?

1.1. 문화적으로 볼 때, 중세를 풍미했던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 그리고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교회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간격이 외적, 내적으로 점점 멀어졌고 그것은 전례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전례공간과 언어, 음악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예식들이 진행되는 제단은 거룩한 공간이라 생각하여 낮은 담으로 평신도들이 있는 공간과 극명하게 구분이 지워졌으며, 전례언어인 라틴어는 신자들이 못 알아듣고 주례자와 복사간에 주고받는 정도로 신비스런 언어로 자리했다. 음악은 신자들이 따라하기 힘들 정도로 품격이 올라갔고 성가대는 점점 어려운 성가를 선호하며 자신들의 음악성을 드러내는 데 자부심을 가졌다. 성가는 더 이상 신자들의 것이 아니라 전문 성가대원들과 성직자의 것이 되었다. 그래서 전례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 평신도는 더 이상 관심이 없어지고 오히려 자신들이 알아듣기 쉽고 감성적으로 다가가기 쉬운 신심행위에 몰두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계몽주의를 통해서 감성보다는 이성을 중시하고 전례의 의미를 찾는 시도들이 생겼으나 어디까지나 전례의 근본적인 의미를 찾기보다는 도덕적으로 신자들을 교육시키려는 수단에 불과했다.

1.2. 전례개혁을 이성적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실질적인 운동으로 전개했던 사람들 중에 전례를 교회의 기도로 표현한 그의 작품 「전례주년」(L’Annee liturgique)을 지은 솔렘 수도원의 게랑제 수도원장(1805~1875)은 그레고리오 성가를 수집하고 정리하였으며 평신도들도 함께할 수 있도록 교육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다른 베네딕도 수도원들에 영향을 미쳤고 칼로엔(Caloen)의 경우에는 신자들이 미사에 함께 할 수 있도록 「신자 미사경본」(Missel des fideles)을 만들어 보급했다.

비오 10세는 성음악의 개혁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여러 염려 중에서」(Tra le sollecitudini(1903년))에서 “교회가 거행하는 공적이고 장엄한 기도에 대한, 그리고 성사거행에 대한 능동적 참여”에 대한 염려를 표현한다. 이러한 교황의 사목적 염려를 본격적으로 논의한 것은 1909년 열린 말린(Malines) 회의로서 이때 베네딕도회 수도자인 보뒤앵(1873~1960)은 전례가 가톨릭 교의의 기초적인 교리를 확립하고 영성 생활을 자극하고 양육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강조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례운동은 독일에 전파되었는데, 전례에 대한 이해와 참여를 증진시킨 것은 마리아 라흐(Maria Laach) 수도원이다. 이곳에서 전례에 관한 연구잡지인 「기도하는 교회」(Ecclesia Orans)가 1918년에 출판되기 시작했으며 이 수도원 소속의 오도 카젤(Odo Casel)은 교부학과 종교학 연구를 통해 “전례는 ‘근원적 신비’인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의 구원업적과 함께 마치 구원의 운반자처럼 현존하게 되는 신비들의 거행”이라고 하였다.

이는 ‘전례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의 결과로써 전례헌장에서 전례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1.3.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는 ‘전례사목연구소 Centre de Pastorale Liturgique’가 설립되어 「하느님의 집」(La Maison-Dieu) 잡지와 전례총서인 Lex Orandi의 출판이 이루어졌다.

비오 12세 교황은 전례헌장의 서곡이라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중재자」(Mediator Dei(1947년))를 통해 전례에 대한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에 대해서 강조하였으며, 독일과 프랑스의 전례 연구소들이 주장한 대로 부활 전야 전례를 복구(1951년)시켰으며 성주간전례를 개혁(1955년)하였다. 그리고 전례개혁을 위한 준비 작업을 지시하여 1948년에 「전례개혁회보」가 나왔는 데, 이 책은 1)전례개혁의 필요성, 2)기본 원리들, 3)조직적 계획, 4)실제적 실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작업들은 요한 23세가 1959년 공의회를 선언했을 때, 전례준비위원회를 위한 가치있는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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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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