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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을 말한다] 내가 뽑은 교회건축 - 서울 반포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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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보수 이전 반포성당.
 
 
   1960년대 서울 인구가 급증하자 강남지구가 개발됐고, 반포아파트가 건설됐다. 그런 가운데 1979년 11월 25일 봉헌된 반포성당은 당시로서는 신도시형 성당의 원조였다.

 반포성당 설립이라는 임무를 받고 1974년 5월 반포공소로 부임한 박용일 신부는 부임하는 바로 그날, 성전 건립 추진을 위한 기성회를 만들었다. 3개월 후 성당 대지를 확보했으며, 곧바로 당시 한양대 유희준 교수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설계가 진행되고 있던 1976년 6월 초대 주임으로 박병윤 신부가 부임했다. 유희준 교수가 기본설계를 완성한 것은 1976년 9월이었다. 그러니까 반포성당의 건축가는 두 분의 사제를 거친 셈이다.

 두 분의 사제는 모두 건축가를 크게 신뢰해줬다. 성당 외관은 기하학적이었다. 내부는 크고 작은 두 개의 삼각형 지붕이 엇물리면서 그 사이에 넣은 유리화를 통해 들어온 빛이 제대를 비추고 있다. 당시로서는 이러한 현대적 공간과 조형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제는 모두 건축가의 설계안에 큰 공감을 표시하고 지원해줬다. 새로 개발되는 지구에 현대적 감각의 성당을 지어야 한다는 두 사제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설계자 유 교수 회고에 따르면, 설계안 중에서 외장 재료를 제외한 모든 것을 그대로 수용해 줬다고 한다. 반포성당은 당시 국전(國展)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박병윤 신부는 반포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천주교 반포교회 건설본부`라는 전담 조직을 편성했다. 조직은 재정과 건설 두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재정에는 기획부(홍보)ㆍ활동부(모금)ㆍ경리부ㆍ추진부를, 건설에는 건축부ㆍ조경부를 뒀다. 지금 봐도 본격적이며 효율적 조직 형태였다. 건설본부는 시공자를 선정하기 위해 가격ㆍ경험ㆍ신앙심ㆍ성실성이라는 선정 기준을 정하기도 했다. 본당 사제는 부족한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 기금 조성 독려반을 운영하는 등 적극적 방법으로 기금을 조성했다.

 이러한 사제의 독려에 힘입어, 기금을 낼 목적으로 가사도우미와 공사장 잡역으로 나가 일한 신자들도 있었으며, 감실과 고상 등을 도맡아 디자인한 김교만 교수는 받은 보수 전부를 희사했다. 기공식이 다가오자 박 신부는 건설본부를 해체하고 성전건립위원회를 편성했다. 그 안에 건설ㆍ재정ㆍ활동 담당 부회장을 두는 등 성당 건립에 다 같이 참여하는 조직을 만드는 데 힘썼다. 지금부터 33년 전 일이다.

 주임신부는 성당 안을 채워야 할 많은 시설과 비품을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캠페인을 벌였다. `은총의 표징 운동`이었다. 성당 꼭대기의 닭, 성모상, `그리스도 왕` 마크 등 건축 외부 설치물만이 아니라 제대ㆍ감실ㆍ조명ㆍ신자석ㆍ십자고상ㆍ제대 촛대ㆍ십자가의 길 등 성당 내부 조형물에 대해 신자들 봉헌을 받는 운동이었다. 이러한 노력이 열매를 맺어 공소 설립 6년 반이 지난 1979년 11월 당시 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을 모시고 봉헌식과 본당 주보 명명식,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주임신부는 1년 9개월 후 다른 성당으로 옮겼다. 성당건축이라는 임무를 맡은 주임 신부의 지혜와 수고란 이런 것이다. 약 40년 전에 시작해 지금에도 모범적인 성전건축 과정을 보여준 반포본당. 그렇게도 어려웠던 성전건축 과정 한가운데에는 박용일ㆍ박병윤 두 신부의 헌신이 깃들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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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2-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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