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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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야기] (20) 사울 VS 다윗

다윗의 성장에 두려워진 사울. 거인 골리앗 죽인 후 전쟁영웅이 된 다윗을 사울은 위험한 존재로 여겨 제거에 나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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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루살렘 옛 시가지(Old City)의 자파 문(Jaffa Gate) 옆 성벽에 위치한 다윗 망대(Tower of David).
 

성경에서 사울과 다윗의 권력 투쟁에 대한 내용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드물다. 모험과 도전, 사랑, 권모술수, 삼각관계, 좌절, 의심, 모함 등 흥행 필수 요소를 두루 갖춘, 한편의 완벽한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완벽한 드라마가 대부분 그렇듯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극적 반전이 있다.

드라마의 첫 장면에선 근엄하고 엄숙한 모습의 사울이 등장한다. 유대민족 최초의 왕, 사울은 인물을 쓰는데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용감하고 힘센 사람을 보면 누구든지 자기에게 불러 모았다”(1사무 14,52).

다윗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다윗에 대해 상반된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사울이 갑옷과 투구를 주자 다윗은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그리고 “제가 이런 무장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이대로는 나설 수가 없습니다” 하고는 갑옷과 투구를 벗어 버렸다(1사무 17,39). 다윗은 무장 경험조차 없었던 풋내기였던 것이다.

반면 같은 사무엘 상권의 16장 18절에는 “그는 비파를 잘 탈 뿐만 아니라 힘센 장사이며 전사로서, 말도 잘하고 풍채도 좋다”고 나온다. 이를 볼 때 다윗은 초창기부터 완벽한 전사는 아니었으나, 전문적 군사 훈련을 통해 차츰 완벽한 군사 지도자로 변모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경은 다윗이 필리스티아(블레셋)와의 에페스담밈 전투에서 거인 전사 골리앗을 죽인 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사무 17장 참조).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방법은 무릿매질이다. 많은 이들이 돌팔매(돌을 던지는 행위)라고 잘못 알고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다윗은 손으로 돌을 던진 것이 아니었다. 무릿매(돌을 끈에 맨 후 끈의 양 끝을 잡고 휘두르다가 한쪽 끝을 놓아 던지는 팔매)를 사용했고, 따라서 무릿매질이 정확한 표현이다.

무릿매는 당시 목동들의 중요한 호신용 무기였지만, 전투용 무기로도 흔히 사용됐다. 무릿매를 사용하는 부대가 별도로 있었을 정도였다. 실제로 훗날 분열왕국 시대에 북이스라엘의 왕 요람과 남유다 왕 여호사팟 연합 부대의 모압 정벌에도 무릿매부대가 크게 활약했다(2열왕 3,25). 900여년 후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자신의 전쟁담을 다룬 「갈리아 전쟁기」에서 무릿매부대가 중무장 및 경무장 보병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어쨌든, 대 골리앗 전투의 승리로 다윗은 이제 유대민족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전쟁 영웅이 됐다. 필리스티아와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유대인들에게 심어준 것이다. 이에 사울 왕가는 처음에는 다윗을 통해 필리스티아 대응 능력을 증대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왕자 요나탄은 심지어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고, 군복과 칼과 활과 허리띠까지도 주었다(1사무 18,2-5 참조). 사울도 다윗을 사위 삼기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상황은 엉뚱한 곳에서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다윗이 대 필리스티아 전투를 주도하면서 연전연승을 거두자 백성들의 관심이 다윗에게 집중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울은 점차 다윗을 경계하게 된다. 다윗의 승승장구를 방치했다가는 자칫 왕조의 기반이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다윗을 위험스런 존재로 인식한 사울은 집요할 만큼 다윗 제거 노력에 나선다. 사울은 왕이었다. 이제 막 정치적 상승세를 타고 있던 다윗으로서는 정면 대응이 불가능했다. 좀 더 힘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다윗은 어쩔 수 없이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사울 입장에서 다윗의 망명은 다윗을 더욱 위험스런 인물로 간주하는 촉매제가 됐을 것이다.

사울은 결국 친위대를 동원, 다윗 세력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여기서 사울은 무리수를 둔다. 다윗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놉의 사제들을 몰살하기도 했다(1사무 22,6-23). 이는 사울 자신의 종교적 기반마저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사무엘과 연대하지 못해 정치적 고립을 자초했던 사울의 정치적 미숙함이 또다시 드러나는 대목이다.

다윗은 다윗대로 살 길을 모색해야 했다. 결국 다윗은 지금까지 칼끝을 마주하고 싸웠던 필리스티아와 전략적으로 손을 잡게 된다(1사무 21,11-1627,1-12). 필리스티아 입장에서도 다윗과의 동맹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는 유대민족과 필리스티아 2파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제3의 친 필리스티아 유대 세력이 새롭게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싸움은 복잡하게 돌아가기 마련이다.

든든한 지원 세력을 얻은 다윗은 이제 마음 놓고 아말렉 등 가나안 남부지역 세력을 정벌, 전리품을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등 정치적 입지를 다져나간다(1사무 30,1-31 참조).

다윗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 구축에 몰두하던 그 시간. 필리스티아는 드디어 눈에 가시였던 사울 왕가에 대한 대대적 공세에 나선다. 사울은 연합세력을 모아 대항해 보려 했지만 그 노력도 실패로 끝나고, 결국 길보아 산 전투에서 처참한 패배를 맛보게 된다. 이 전투에서 사울왕과 요나탄 왕자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울 왕가 사람들이 전사했다. 성경은 그 비참함을 이렇게 묘사한다.

“사울 가까이에서 싸움이 격렬해졌다. 사울이 (적의)궁수들에게 큰 부상을 입었다. 사울이 자기 무기병에게 명령하였다. ‘칼을 뽑아 나를 찔러라…’ 그러나 무기병은 너무 두려워서 찌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울은 자기 칼을 세우고 그 위에 엎어졌다. 사울이 죽는 것을 보고, 무기병도 칼 위에 엎어져 그와 함께 죽었다”(1사무 31,3-5).

유대 민족 최초의 왕이 죽었다.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의 주요 거점들이 대부분 필리스티아 점령 하에 들어갔다. 가나안에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대적할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이때 다윗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우광호 기자
( kwangho@catholic.or.kr )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09-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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