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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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 아라

글=김인정, 그림=임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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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가락 끝에 안간힘을 주어 간신히 창문을 닫는다. 하지만 톱질 소리는 기어이 창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내 귓구멍에 파고든다. 나는 몸부림을 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밖을 내다보니 기다란 각목을 자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보인다. 아저씨는 톱질을 멈추고 톱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다시 허리를 숙인다. 톱질 소리는 끊기고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나는 한숨을 내쉰다.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톱질은 하루 종일 계속될 것이다. 나는 무거운 몸을 달래며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이 집에 사는 사람은 아저씨와 나 둘뿐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잠이 다 깨기도 전에 톱질부터 해야 한다니. 나는 거울을 보며 눈곱을 닦아내고 머리를 대충 틀어 묶고는 방을 나선다.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계단이 앓는 소리를 낸다.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은 오래된 탓인지 조금 세게 밟았다 싶으면 여지없이 나뭇결이 뒤틀리는 소리가 난다. 생각 없이 계단을 급하게 내려가다가 바닥을 비집고 나온 나무가시를 밟고는 발바닥에 박힌 가시를 빼느라 진땀을 뺀 적도 있다. 밖으로 나가는 모든 통로는 이 계단과 이어져 있기 때문에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계단을 밟곤 한다. 그때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늘 신경이 쓰인다. 나의 동선을 아저씨에게 꼬박꼬박 보고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계단이 있기 때문에, 아저씨와 한집에서 지내면서도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지만 이 계단이, 누군가를 신경 쓰며 생활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렇게 알려주기도 한다. 덕분에 나는 계단을 밟고 내려갈 때마다 발을 최대한 가볍게 내딛어야 했다.

 나는 1층 거실이 어둡다는 것을 느끼고 창가에 다가가 커튼 한쪽을 젖힌다. 유리창이 한쪽 벽면을 다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될 만큼 커서 커튼을 한쪽만 젖혔는데도 거실이 순식간에 밝아진다. 반대쪽 커튼을 오른쪽으로 끌어내자 유리창 너머로 아저씨의 뒷모습이 불쑥 나타난다. 아저씨의 작은 몸이 톱질을 할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린다. 각목은 아저씨가 짧은 다리로 애써 버팅기고 있는 것이 무색하리만큼 제멋대로 움직인다. 나는 미세하게 떨리는 아저씨의 다리를 쳐다본다. 잠시 몸을 일으켜 허리를 뒤로 젖히려던 아저씨는 창가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톱을 흔들며 웃는다. 톱을 앞뒤로 흔들자 톱날 끝이 크게 휘청거린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저씨, 뭐하세요? 아저씨는 내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지를 입에 갖다 대더니 톱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날카로운 톱날이 공격적으로 느껴진다. 톱날 끝을 따라가던 내 시선이 나무그늘 밑에서 팔자 좋게 잠을 자고 있는 강아지 한 마리에 가 닿는다. 아저씨가 아침부터 이 난리를 피운 이유를 알 것 같다. 나는 속으로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쉰다. 강아지는 이 난리 통에도 꿈적하지 않고 배를 뒤집어 깐 채 늘어지게 자고 있다. 비를 맞은 것처럼 얼굴이며 몸이 흠뻑 젖은 아저씨는 곧바로 다시 톱질을 하기 시작한다. 나는 아저씨 옆에 쭈그리고 앉아 여전히 제멋대로 흔들리고 있는 각목을 꽉 붙든다. 아저씨는 나를 향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각목이 전과 달리 움직이지 않자 아저씨의 톱질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한다. 덩달아 각목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어깨가 뻐근해지자 나는 당장에 손을 놓고 싶었지만 각목에 떨어지는 아저씨의 땀방울을 본 이상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어깨가 거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돼서야 끝난 톱질은 곧바로 망치질로 이어졌다. 망치질도 그다지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못 끝이 여기저기 튀어나와서 몇 번씩 다시 박아야 했다. 망치를 내려칠 때마다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는 것 같았다. 댕댕. 아저씨의 망치는 못을 잡고 있는 내 손가락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갔다. 그럴 때마다 강아지 집에 장식품처럼 대롱대롱 박혀있는 내 손가락이 떠올랐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망치질도 내 몫이 되고 말았다. 아저씨는 나를 말리기는커녕 멀쩡히 생긴 못을 골라 미리 건네기까지 했다.

 아라야, 이리와. 강아지는 원래부터 아라였던 것처럼 아저씨에게 쪼르르 달려오더니 자기 집에 잘도 찾아 들어간다. 아라가 또 늘었다. 아저씨는 아라를 안아 들어 몸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아라야, 목욕해야겠다. 아저씨는 아라를 품에 안고 마당에 있는 수돗가로 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나는 아라를 다루는 아저씨의 서툰 손길을 보며 또다시 고민에 빠진다. 아저씨 손안에서 발버둥을 치는 아라를 보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위해 할 수 없이 발걸음을 떼는 순간 아저씨가 고개를 홱 돌린다. 아참! 갈비찜 해놨는데 좀 가져가서 먹어. 나는 아저씨의 뒤통수를 확인한 후 재빨리 집을 향해 뛴다.

 나는 갈비를 허겁지겁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갈비는 허기진 속을 빨리 채울 수 있을 만큼 적당히 식었다. 정신없이 뜯다 보니 갈비는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냄비를 씻는다. 나는 아저씨가 음식들을 갖다 줄 때면 당장에 먹지 않더라도 냄비나 그릇들은 곧바로 씻어서 갖다 준다. 내 나름대로 예의를 차리는 것이다. 아저씨는 빈 그릇들을 가져다 줄 때마다 귀찮지 않게 밥을 같이 먹자고 했지만 나는 단번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어색했다. 언젠가 아저씨는 나에게 일일이 그릇을 씻어다 주는 일이 불편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 식사할 수 있다는 편안함이 조금 불편할 뿐, 그릇을 씻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덜 닦인 곳이 없는지 냄비를 이리저리 확인하며 1층으로 내려간다. 아저씨는 아라에게 물을 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창가에 있는 `아라`는 아저씨가 키우는 난초다. 나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일주일 전쯤에 아저씨는 낑낑대며 화분 하나를 들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얼른 물 한잔을 떠다 내밀며 물었다. 사 오신 거예요? 아저씨는 창가에 화분을 내려놓고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멀쩡한 화분을 누가 버렸길래 가져왔어. 아저씨는 내가 내민 물을 받아 그대로 난초에 부으며 대답했다. 멀쩡하다고 하기엔 난초는 거의 말라 죽어있었다. 그리고 화분은 여지없이 `아라`가 되어 아저씨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나는 언젠가 `진짜` 아라를 본 적이 있다.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아라는 푹 파인 보조개가 특히 예뻤다. 아저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보곤 했다. 나는 아저씨가 아라를 어떻게 저 멀리 캐나다로 떠나보낼 수 있었을까 싶었다. 아라는 아저씨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되기도 했지만, 곧 아저씨가 가진 최대약점이기도 했다. 아라와 관련된 일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졌기 때문이다. 늘 외국에서 살고 싶어 하던 아줌마는 그 약점을 노린 것이 분명하다. 어느 날 아라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아저씨를 향해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캐나다에 가고 싶어요. 결국, 아줌마의 작전은 성공했다. 아저씨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했지만



가톨릭평화신문  201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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