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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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쑥개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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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댁은 초저녁부터 자꾸만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눈을 붙이려 자리에 들었다가 벌떡 일어나기를 벌써 여러 차례였다. 이대로 잠들었다간 새벽을 그냥 지나칠 것 같다. 방문을 열었다. 농익은 아카시아꽃 향기가 코를 톡 쏜다. 부엌문을 밀쳤다. 벽에 붙은 스위치를 올린다. 백열등 불빛에 그림자가 감천댁을 바싹 붙어 다닌다. 솥뚜껑을 열어 물을 반쯤 붓고 뚜껑을 닫는다. 감천댁은 솔가지를 꺾는다. 겨우내 잘 마른 솔가지가 탁탁 부러지며 하얀 속살을 드러낸다. 성냥을 그어서 아궁이 속으로 던진다. 향긋한 마른 솔 냄새는 언제 맡아도 머리 속을 맑게 해준다 .반질반질 길이 잘 든 무쇠솥이 눈물 두어 줄기를 흘리더니 금세 물이 끓는다. 잎이 시들까봐 마루 끝에 이슬을 맞히려고 펼쳐둔 대 소쿠리를 부뚜막에 가져다 놓는다. 하루 종일 점심도 거른 채 감천 뚝방에서 보드라운 새 순만 캐 왔기 때문에 쑥 냄새도 연하다. 솥뚜껑을 부뚜막에 반쯤 걸쳐 놓는다. 소금 한 웅큼을 집어넣고 소쿠리의 쑥을 한 잎도 남기지 않고 솥에 털어넣는다. 나무주걱으로 위아래를 뒤집어가면서도 눈은 연신 아궁이 속을 살핀다. 불 조절을 잘 해야 쑥이 설익지도 않고 색깔도 곱게 데쳐진다. 이 일만은 육십이 다된 딸도 감천댁을 따라오지 못했다. 감천댁이 공연한 짓을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잘 데쳐진 쑥을 깨끗이 헹구어 물기를 꼭 짜놓은 다음이었다. 저녁 때 큰며느리가 전화에다 대고 두번 세번 제발 쑥개떡을 해오지 못하게 말리던 것을 퍼뜩 떠올렸다. 틀림없이 큰아들 놈이 남사스럽다고 제 입으로는 말 못하고 제 댁을 시킨 것이 분명했다. 감천댁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 하곤 며느리 부탁을 무시하기로 작정한다. 쌀은 벌써 빻아 놓았고 콩도 노릇노릇 정성을 들여 잘 볶았다. 콩고물 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했는데 이제 와서 말도 안 될 일이었다. 누가 서울 잔치에 안 가본 사람이 있는 줄 아나? 나도 마 다 들어서 서울 인심 너그들보다 더 잘 아는기라. 잔치 벌인다고 동네 사람 한차 태우고 갔다가 달랑 갈비탕 한 그릇씩 안겨주면 내사 마 낯 뜨거버서 우찌 살지 모르는기라. 혼자 궁시렁 대보지만 감천댁은 자꾸만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큰 아궁이에 남아있는 불씨를 작은 아궁이로 옮긴다. 물을 적당히 붓고 시루를 작은 솥 위에 올려놓는다. 반죽을 알맞게 해서 시루 번을 만들어 김이 새지 않도록 솥과 시루 사이를 빈틈없이 메워 놓는다. 쑥을 탈탈 털어서 쌀가루를 버무린다. 감천댁은 떡을 할 때는 조상님께 비는 마음으로 시루에 쌀가루를 안친다. 떡 익는 냄새가 집안에 가득 찼다. 아궁이 불을 줄이고 뜸을 들인다. 베보자기를 씌운 시루 뚜껑을 열었다. 김이 서려 부엌이 온통 뿌옇다. 부엌 가운데 안반을 내려놓고 떡을 쏟았다. 기계에 내리지 않고 떡메로 쳐야지 쑥개떡은 제 맛을 낸다. 옛날 같았으면 귀 밝은 노인네들이 떡메 소리가 나는 곳으로 찾아오곤 했었다. 지금은 한집 건너 빈집이다. 떡 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탓도 있겠지만 저녁을 건너뛰는 집이 없어 밤중에 떡을 쳐도 아무도 찾아오는 손님이 없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떡을 해 놓고 보니 감천댁 콧마루가 시큰해진다. 보기 좋은 크기로 세 쪽을 만들어 고물을 넉넉히 묻혔다. 놋대접에 쑥개떡 세 쪽을 담고 새벽에 차에 싣고 갈 술 한병을 빼낸다. 작은 쟁반에 받혀 보자기에 얌전히 싸들고 집을 나선다. 영기네 포도밭을 지나 순기네 목장으로 난 지름길을 택해 여름실을 찾아간다.
 감천댁이 상석도 없이 누워 있는 남편의 묏등 앞에 멈추어 섰을 때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단 냄새가 폴폴 났다. 보자기를 풀고 쑥개떡을 펼친다. 술병 뚜껑을 따고 묏등 주위를 돌면서 조금씩 적신다. 반쯤 남은 술병을 떡 옆에 놓는다. 이마에 손을 올리고 다소곳이 절을 두번 한다. 삶이 버거울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한바탕 해대다 내려갈 때는 맺힌 속이 뚫리는 맛에 젊은 날엔 자주 찾았었다. 하지만 이렇게 달님을 앞세우고 와 보기는 처음이다. 감천댁은 남편 앞에 앉기만 하면 주절주절 고해바칠 말도 많고 한바탕 퍼부울 걸죽한 욕설도 많았다. 하지만 그게 모두가 한가하고 덜 급해서였다. 하루에 한매듭씩 자라는 대나무보다 더 빨리 커가는 자식놈들 입 셋을 하루 세번씩 메꾸려고 바둥거리다 보면 동네 뒷산에 잠든 남편한테 찾아올 틈도 없었다. 쑥개떡을 조금씩 떼어내 사방으로 고수레하는 감천댁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배인다. 남편이 죽고 나자 당장 끼니거리가 없었다. 네 식구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틈만 나면 쑥을 캐고는 하였다. 일할 곳이 마땅찮던 시절이었다. 품앗이로 떼울 수 있는 일도 기꺼이 감천댁에게 날품을 주었다. 품삯으로 달랑 보리쌀 닷되만 주는 집은 없었다. 소쿠리에는 남은 밥과 밑반찬들을 푸짐하게 챙겨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만약 그때 동네 사람들이 모른척 했더라면 감천댁은 세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인 감천으로 가서 친정 부모에게 아픈 손가락이 되었을 것이다. 요즘 들어 자꾸만 옛날 생각이 자주 난다. 그때마다 감천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못하지 못하고 말고.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때는 마 겁도 없었제. 그때나 지금이나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 땅덩어리 제대로 못 가진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감천댁은 가슴이 뿌듯해진다. 비록 집 앞에 있는 남새밭 다섯 마지기가 전부이지만 남들이 가을걷이를 해서 밭뙈기 사모을 적에 감천댁은 기를 쓰고 자식들 공부를 시켰다.
 밥술이나 먹고사는 집에서도 앞다투어 자식들을 가까운 구미 공단으로 보내는 것이 유행인 때가 있었다. 장대 같은 아들놈들 줄줄이 놔두고 헛고생을 한다고 알게 모르게 눈총도 많이 받았다. 쌀 열가마도 넘는 등록금을 제때에 내어준 적이 한번도 없었다. 언제나 이차 삼차 추가 등록 때에 겨우 올려 보내곤 했다. 술병을 들어 묏등에 붓고 반은 남겨서 감천댁이 홀랑 비워내고 손등으로 입가를 쓱싹 문지른다. 그래도 이게 다 당신 덕인기라. 집게손가락으로 코를 한번 팽 풀고는 잔디를 만지작거린다. 당신이 이렇게 딱 버티고 누워서 우리 네 식구 잘 돌보아주는데 우째 자식들이 샛길로 빠지겠노. 조금도 슬프지 않은데 볼 밑으로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 점만은 감천댁이 죽은 남편한테 늘 고마워했다. 자식 셋을 키우면서 학교에는 입학식과 졸업식 날 말고는 한번도 간 적이 없었다. 행여나 배를 곯으면 나쁜 생각이 들까봐 오며가며 허기를 때우라고 언제나 쑥개떡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 동네 사람들이 조마면 쑥을 씨를 말리겠다. 물리지도 안느냐. 고 한마디씩 할 적마다 모두 우스갯소리로 넘기면서 여전히 틈만 나면 쑥 캐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따가 새벽에 버스 오거든 당신도 따라오소. 감천댁이 이슬이 촉촉한 봉분을 어루만진다. 내 옆에 바싹 붙어 앉아서 자식놈들 절도 받아보고 술도 한번 취해보소. 감천댁이 빈 떡그릇을 싸들고 야트막한 산길을 내려간다. 달님이 앞장을 선다. 오늘 저녁 감천댁의 들뜬 마음을 달님이 눈치를 챘는지 친정 동네가 건너다보이는 감천 뚝길로 이끈다. 하얀 모래가 펼쳐진 감천 모래밭에 앉았다. 목이 타는지 달님이 감천에 얼굴을 담그고 강물을 마신다. 감천댁도 달님을 따라서 강물에 얼굴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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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0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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