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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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그들은 낙타를 사막으로 내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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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기가 휘움한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미자는 작은 등을 움츠리고 겹으로 된 샛노란 실크 천에 자를 댄다. 치수대로 화장 앞뒤 기장 깃고대 순으로 선을 긋는다. 연필을 내려놓고 가위를 집었다. 옷감을 살짝 들면서 그어진 선을 따라 가위질을 했다. 옷감 잘려 나가는 소리가 생살이 잘리는 것처럼 느껴져 몸이 움찔거려졌다. 마름질 한 옷감을 침 핀으로 고정시키고 밖을 내다보았다. 통 유리에 비춰진 시장골목이 스산해 보인다. 벌써 찬바람이 났나. 미자는 밖에 나앉아 찬바람을 맞고 있었던 사람처럼 어깨를 떨면서 고개를 돌린다. 방바닥에 까만 줄을 늘어뜨린 전화기가 눈길을 붙잡았다.
“니 에미가… 쓰러졌다 갑자기….”
힘없이 떨리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 벌써 나흘이나 지난 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웅얼거리는 음성은 아직도 귓속을 맴돌았다. 미자는 가만히 앉아 전화기를 노려보다가 중얼거린다.
나에게 엄마가 있었다구.
그녀는 더 참을 수가 없는지 벌떡 일어나 서성거린다. 그녀의 툭 튀어나온 눈에 투명한 액체가 번들거렸다. 손님이 옷맵시를 비춰 보던 거울에 그녀의 왜소한 체구와 낙타처럼 굽은 등이 스치듯 비쳐 보인다.
마음을 가다듬으며 선홍색 치맛감을 바닥에 펼쳤다. 모두 여섯 폭으로 나누어 겹쳐 놓고 가위를 들었다. 바람이 살 속을 헤집고 들었다. 바람 탓인지 진열장의 여름옷이 유난히 쓸쓸해 보인다. 벌써부터 정리해야겠다고 생각만 했었지 손이 가지 않았던 일이었다. 마음이 급한지 손놀림이 빨라졌다. 옷감 스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방안에 퍼졌다. 마름질한 것을 한 쪽으로 밀어놓고 서둘러 일어났다. 진열장 문을 열고 문턱으로 올라섰다. 여름 깨끼와 갑사는 잘 보이지 않는 끝으로 밀어 놓고 모시적삼은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닥으로 내려서서 벽에 걸린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한쪽 벽은 치마 위에 저고리를 겹쳐 놓은 옷감들이었고 그 옆은 완성된 한복들이다. 가장 눈에 띄는 옷을 골라 내려놓았다. 다시 진열장을 바라보고 색상에 맞춰 빈자리를 채웠다. 푸른빛이 도는 형광등 조명은 언제나 진열장 안을 화사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뒤편에 구부리고 앉아 옷을 지었다. 미자는 슬며시 웃으면서 적삼을 들었다. 이렇게 화려한 방에서 30년 세월을 보냈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모시 적삼을 들고 보관용 옷장 앞으로 갔다. 옷장을 열어 새 비닐을 씌운 다음 안 쪽으로 걸었다. 언뜻 제일 밑 칸에 눈이 갔다. 빛 바랜 다홍색 보자기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 서서 바라보다가 그냥 문을 닫았다. 셔터 올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맞은 편 약국에서 나는 소리였다. 미자는 무심코 서서 쳐다보았다. 골목 안쪽의 김밥 집 문이 열리더니 수연이가 나왔다. 뒤이어 책가방을 손에 든 수연엄마도 나왔다. 수연이는 무엇을 표현하려는지 양 볼의 근육을 실룩이면서 입을 열심히 움직거린다. 수연엄마는 건성으로 응수하면서 딸의 손을 잡고 골목으로 나온다.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이마에 어둑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수연이는 몸은 엄마만 한데 표정은 부자연스럽고 천진해 보인다. 미자는 수연이의 불안하게 흔들리는 팔과 끌듯이 무겁게 떼어놓는 다리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뭔가가 미자의 정수리를 세게 내려쳤다. “이년아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어. 네년은 병신만 눈에 띄니. 그러니까 맨 날 그 모양 그 꼴이지 이 빙신아.”
정신이 아뜩하니 흐려졌다. 미자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뒤흔든다. 그리고는 제발… 하고 낮게 소리 지르며 질끈 눈을 감았다. 엄마의 왁살스런 손이다. 그들 모녀에게 정신이 팔려 있을 때나 뭔가에 열중해 있을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엄마의 환영이었다. 미자는 이미 쓸어 올려져 가뿐한 머리칼을 다시 두 손으로 쓸어 올리며 얼굴을 들었다.
어느새 아침은 말끔히 벗어져 골목은 사람들의 부산한 발길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보석 가게 문방구 장난감 가게들이 하나하나 문을 열었다. 미자는 낮게 한숨을 쉬며 마름질해 놓았던 치마를 무릎 위에 놓고 앉았다. 수연이의 옷을 만드는 것이다. 수연이는 말도 잘 못하고 제 몸 간수도 잘 못하는 뇌성마비 장애아다. 그래서 입기 편한 통치마를 만들기로 했다. 풀어지지 않게 시접을 넉넉히 넣어 시침을 했다. 이젠 재봉틀에 앉아 박음질을 해야 한다. 옷감을 들고 막 일어서려는데 유리문을 열고 누군가가 얼굴을 빼죽이 내민다. 수연엄마다. “왜 들어오지 않구.”
“아니에요. 지나가다가 얼마나 됐나 하구요.”
“이따 오후쯤이나 되는데. 어젠 내가 담이 결려서 오늘 아침에야 시작했어. 내일 입을 거라면 걱정 마. 지금 하고 있으니까.”
“그냥 옷 돼 가는 게 궁금해 들렀어요. 이따가 다시 올게요.”
슬며시 문을 닫고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수연 엄마의 뒷모습이 좀 허전해 보인다. 추석도 지났는데 한복을 맞춘 것부터가 이상했다. 무슨 일일까? 미자는 재봉틀을 돌리면서 내내 수연 엄마의 얼굴을 지우지 못한다. 아무래도 그냥 들른 것 같지는 않았다. 수연 엄마가 어쩌다 한 번씩 들르는 집은 미자네 한복 집뿐이었다. 그러나 반갑지만은 않았다. 언제나 어둡고 찌든 얼굴과 한숨 섞인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가슴이 답답했다. 그녀는 장애아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남편과 시댁 식구들에게 냉대를 받다가 결국 이혼을 당했다. 그러다 보니 늘 신세 한탄과 한숨뿐이었다. 처음 한두 번은 안타깝게 생각하고 들어주었는데 자꾸 들어주려니 얼굴만 봐도 지레 마음이 무거워졌다.
박음질을 끝낸 치마를 들고 재봉틀에서 내려앉았다. 자신을 대할 때면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병약한 아버지 대신 힘든 농사일을 거침없이 해치우던 억척스런 엄마였는데 자신에겐 말 한마디 따뜻하게 해준 적 없던 엄마였다. 치맛단을 공그르며 눈을 들어 거울을 바라보았다. 웅크리고 앉아 있는 처연한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어린 시절에는 거울을 보는 게 싫었다. 몸은 일찍 성장을 멈추었고 뇌만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끔찍한 모습을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왜 그렇게 기가 죽어서 살아야 했는지. 어려서 자신의 모습을 자각할 수 없을 때에도 엄마나 언니들 앞에서는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어쩌다 엄마의 눈빛에 서슬이라도 비치면 주눅이 들어 오금이 저리고 옴짝달싹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가뜩이나 작은 몸은 더욱 쪼그라들고 고개를 무릎 사이로 파묻으면 엄마의 억센 손은 여지없이 등짝을 후려쳤다. 흉측하게 굽은 등이 정면으로 엄마의 눈을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미자는 눈앞이 흐려지자 얼른 옷감을 내려놓고 눈물을 닦았다. 요즘은 자주 눈물을 찍어내게 된다. 뼈아프고 암담했던 시절을 늘 가슴에 담고 살았어도 요즘처럼 자주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는데…. 미자는 길게 한숨을 쉬며 다시 옷감을 잡아 치맛단에 눈을 둔다. 노랑 저고리에 선홍색 치마. 옷 빛이 참 곱다. 새삼 딸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색동 저고리 노랑 저고리 분홍 저고리 치마는 아마 모두 빨강 아니면 분홍이었지. 연두 빛의 당의도 입혀 보고 머리에는 까만 천에 금박을 한 조바위도 씌워 보고. 미자는 딸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공연히 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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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03-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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