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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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어울리는데요?
세 번째의 모자를 골랐을 때 내 표정을 읽었는지 젊은 여주인은 환하게 포장된 판촉용 미소를 지어보였다. 직접 한번 보세요. 코 앞에 들이밀어진 거울 속에는 벙거지모자를 푹 눌러쓴 채 핏기없이 까칠한 얼굴이 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그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왼쪽 오른쪽 고개를 틀어보았다. 거울 속의 남자가 오른쪽 왼쪽 고개를 틀고 있었다.
뒷머리까지 다 가려주니깐 아무도 모르겠어요.
여주인은 심상스럽게 말하려 노력했겠지만 이미 눈가엔 참지 못하고 흘려 보낸 장난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윤기마저 흐르는 머리가 코믹스럽기도 하겠지. 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뉴욕 양키즈의 마크가 박힌 야구모자를 벗고 처음 골라낸 벙거지 모자를 눌러 썼을 때 여자의 얼굴에서 일어나던 미묘한 표정의 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엔 신기함에서 시작한 표정이 이내 경멸스러움으로 번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고객은 고객인지라 애써 속엣것을 숨기고 모자를 팔아내기 위해 포장된 미소 위의 화장기가 쩍쩍 갈라져 떨어져 나올 것 같다 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일부러 여자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고 다시 한 번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벙거지모자를 눌러쓴 뒤 뒤통수에 손을 가져가 보았다. 벙거지는 완벽하게 뒤통수를 가려주고 있었다. 나는 원래 비교적 장발을 하는 편에 속했다. 마른 얼굴에 숱 많은 장발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왠지 장발이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머리카락이 죄다 빠져 버렸으니 허전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두개골의 뒤쪽을 만져보는 습관이 생겼다. 유난히도 머리 숱이 많은데다가 고교시절의 그 지독한 두발 단속시절에도 요리조리 빠져 나가며 나만의 스타일을 고집해 왔었다. 물론 록가수처럼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은 아니었지만 앞머리카락은 입술까지 뒷머리카락은 한웅큼 가득 잡힐 만큼 그리고 뒷목을 가려줄 만큼. 이런 식의 나만의 두발규정이 있었고 그것은 대학시절에도 그리고 졸업하여 회사에 다닐 때에도 변함없었다. 어머니는 제발 앞머리 좀 시원스레 잘라내라고 성화셨지만 스포츠형으로 미리 잘라야겠어요. 머리카락 빠지기 시작하면 듬성듬성 빠진 머리카락이 보기 싫을 테니까. 했을 때 가장 서운해 하신 것도 어머니셨다.
정확히 언제부터서다 라고 찝어 말할 수 없지만 나에게는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아마도 머리카락이 빠져 버리고 그 황량한 사막 같은 두피를 감추기 위해 야구모자를 쓴 이후부터일 것이다. 야구모자를 쓰면 뒷머리의 절반은 그대로 드러났다. 바람이 불면 바람의 자리가 그대로 느껴졌다. 나로선 소름끼치는 생소함이었다.
나를 세상으로부터 절망하게 하는 것은 몸 속의 질병이 아니라 머리카락이었다. 고대 유대민족은 한센병 환자 같은 경우엔 하늘이 내린 저주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사회와 격리되어 생활하고 그들이 마을을 혹 지나치게 될라치면 문둥이가 지나갑니다 라고 소리를 질러 마을 사람들이 피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한센병이 완치가 가능하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런 사정은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하다. 그래서 그 유명한 소록도의 나환자촌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나 역시 하늘이 내린 저주가 아닐까 생각했던 것일까.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부끄러움 혹은 죄의식. 난 그저 아픈 것일 뿐야. 우리나라에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이겠어. 스스로 그렇게 타일러 보지만 어느새 나는 다시 죄의식에 젖어 있었다. 내가 실정법을 어길 만큼 비도덕적이거나 난폭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꾸 이 질병이 내 안의 종적을 알 수 없는 어떤 실체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워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성서에서 말하는 원죄인지 아니면 괜한 자책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 것일까. 죄의식 누군가 나를 추적하고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 서울에서 광주행 고속버스에 올랐을 때부터 보이지 않는 추적자가 있었다. 휙 돌아보면 두꺼운 돋보기를 쓴 육십 노인이 서 있었고 또 휙 돌아보면 젊은 여자가 휴대폰을 귀에 붙이고 열심히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 추적자에 대한 의구심은 광주종합터미널에서 복내행 버스로 갈아타는 찰나 더욱 강한 파장으로 밀려왔다. 광주라면 내가 십여년간 공부를 한 곳이었다.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의 학과와 동아리까지. 거기에 문학회 활동을 했던 지인들까지 합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을 겪은 곳이었다. 언제라도 그들이 날 알아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소리칠 것만 같았다. 떨어져 저리 비켜. 그랬다. 내게 질병은 불편함이 아니라 차라리 벽이었다. 사람과의 관계를 막는 견고한 벽. 세상으로의 소통을 막는 벽. 그녀는 발병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더구나 이 질병은 재발이 잦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서 마음을 끊어버렸다. 대학 졸업과 함께 나를 스카우트했던 곳도 완곡한 표현으로 퇴직을 권유했다. 매일 병원에 가는 것이 아니고 나머지 25일 정도는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습니다. 나는 사장의 눈을 바라보며 분명한 의지를 전했다. 건강해지면 다시 일했으면 좋겠네. 사장은 명쾌하고도 분명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일년도 채우지 못한 근무기간 때문에 이렇다 할 퇴직금도 없이 열흘치 수당이 든 봉투만 받아든 채 회사 문을 나서야 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 신경이 날카로우면 치료 효과가 반감되거든요. 하얀 가운의 목소리가 귓바퀴에 쟁쟁거린다. 신경이 날카롭다기보다는 약해져 있다는 편이 옳겠지. 그래 내가 너무 예민한 거야. 누가 날 미행한단 말인가. 어처구니없는 상상력일 뿐야.
버스가 광주시내를 빠져 나온 후에야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김광석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재빠르게 뒤로 물러서고 있는 풍경을 완상하는 여유를 부렸다. 복내행 국도로 접어든 버스 안에는 나를 포함해 대여섯명이 듬성듬성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다들 일행이 있었다. 다만 털모자를 눌러쓴 중년의 남자가 옆에 아무도 동행하지 않은 채 저만치 앉아 있었지만 버스의 뒤편에 앉아있는 나는 오히려 그들을 미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다 털모자의 남자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엉겁결에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신문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검붉은 노동자의 얼굴 남자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누군가는 아니었다. 얼마 후 중년의 남자는 잠이 든 모양인지 차가 기우는 방향대로 고개가 힘없이 흔들거렸다. 나도 그제서야 노곤함을 느끼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한시간쯤 뒤면 나는 복내에 도착해 있을 터였다.
치유센터는 초행이 아니다. 삼주전쯤 이곳에서 열린 전인치유에 관한 4박5일짜리 강의를 들으러 온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그래도 수강생들 때문에 북적였는데 지금은 쓸쓸해보일 정도로 한적했다. 치유센터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연못이었다. 계곡에서 흘러 나는 물줄기를 끌어내어 만든 인공 연못이었다. 연못은 바닥의 자갈 하나까지 셀 수 있을 만큼 맑았다. 물 속에서는 비단잉어가 무리를 지어 지느러미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연못의 왼쪽에는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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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0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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